사실은 유령이 아니거든?

(수많은 추리물과 공포물의 스포일러들이 난무합니다.)

'사실은 유령이 아니거든?' 공식이 가장 인기를 끌었던 건 고딕 소설의 전성기였습니다. 특히 앤 래드클리프의 소설들이 그랬죠. 황폐하고 낡은 대저택에서 유령이 한 짓이 분명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막판에 보면 이 모든 것들은 비교적 현실적인 설명으로 충분히 해결되는 일이었죠. 래드클리프의 이 수법은 그 뒤에도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나 버넷 부인의 [비밀의 화원]도 그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공식은 에드가 앨런 포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뒤로 새로운 인기를 끌었습니다. 포의 첫 추리소설인 [모르그 가의 살인]도 이 공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거의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보이는 불가능 범죄가 알고보니 달아난 오랑우탄의 짓이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니까요. 수많은 작가들이 이 수법을 사용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작가는 존 딕슨 카입니다. 카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유령, 투명인간, 불사인간, 마녀, 가문의 저주와 같은 고딕 소설의 호러 요소들을 재료로 삼은 본격추리물이죠. 그는 이런 트릭에 지나치게 매료된 나머지 종종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기도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화형법정]은 추리물로도, 초자연적인 호러물로도 완벽하게 기능하는 양면도형적인 공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공식이 본격적으로 호러 영화에 이식된 건, 피에르 브왈로와 토마 나르스자크의 소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 의해 [디아볼릭]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뒤부터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도 같은 부류에 드는 작품이지만, 이 장르에서는 보다 싼 작품들이 대세를 이룹니다. 얼마 전에 제가 리뷰한 에밀리오 미랄리아의 작품들이 그 흔한 예들 중 하나이죠. 대부분 이런 작품들에서 유령의 짓으로 여겨지는 일들은 순전히 누군가를 겁주거나 죽이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공들여 조작한 연극입니다. 은근슬쩍 호러 분위기를 내서 단서를 감추려는 존 딕슨 카의 소설보다 악질적이고 더 비현실적이죠. 바로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추리물보다는 호러의 영역에 남는 것이지만요.

최근 예로는? 한국영화를 예로 들어보죠. 김지운의 히트작인 [장화, 홍련]은 긴 머리 여자 귀신이 나오는 정통적인 호러를 의도하다 갑자기 사이코 스릴러로 돌변하는 작품입니다. 물론 그 뒤에 또 긴 머리 귀신이 나오긴 하지만 형식적으로 이 작품은 40년대에 유행했던 정신분석 미스터리와 더 비슷하죠. 올해 나온 안상훈의 [아랑] 역시 [장화, 홍련]과 개념은 같은데, 트릭은 존 딕슨 카나 브왈로/나르스자크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전자가 다소 불안정한 정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영리한 지능범의 계획 범죄인 것이죠. (06/10/09)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