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알퐁소 쿠아론 Alfonso Cuarón

주연
에단 호크....피네간 벨
Ethan Hawke....Finnegan Bell
기네스 팰트로....에스텔라
Gwyneth Paltrow....Estella
행크 아자리아....월터 플레인
Hank Azaria....Walter Plane
크리스 쿠퍼....조 아저씨
Chris Cooper....Uncle Joe
앤 밴크로프트....노라 디거즈 딘스무어 여사
Anne Bancroft....Ms. Nora Diggers Dinsmoor
로버트 드 니로....러스티그
Robert De Niro....Lustig
제레미 제임스 키스너....피네건 (10살)
Jeremy James Kissner....Finnegan, age 10
라켈 보덴....에스텔라 (10살)
Raquel Beaudene....Estella, age 10

파프리카 [위대한 유산]은 헐리웃에서 현대판으로 업데이트된 또다른 고전입니다. 어떻게 생각해요?

듀나 '또 하나가 만들어졌구나'라고 생각하죠. 전에도 말했지만 업데이트 자체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여기까지 나가면 이런 영화라고 해서 다른 영화랑 크게 차별해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이 영화를 [로미오 + 줄리엣]에서 분리시켜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로미오 + 줄리엣]은 20세기 복장을 한 사람들이 20세기의 배경에서 행동하기는 하지만 대사와 스토리는 중세 이탈리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쿠아론의 [위대한 유산]은 완전한 20세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각색이 그 배경에 어울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여기서 질문이 하나 튀어나오죠. 과연 [위대한 유산]이 20세기 배경에 어울리는 이야기입니까?

파프리카 어울리지 못할 것은 없죠. 적어도 그 작품이 아직도 읽히는 것은 그 작품이 아직까지 독자들에게 어필한다는 말일테니까요.

듀나 그건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도 여전히 어필하는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의 스토리가 20세기의 배경에 곧장 이식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노예제도라는 것이 빠진다면 어떻게 작품의 스토리가 유지될 수 있겠어요?

마찬가지로, [위대한 유산]도 19세기와 그 상황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작품의 요소들이 과연 20세기의 배경에서도 그대로 맞아 떨어질 수 있는 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스 해비셤과 같은 인물이 7,80년대의 미국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핍에게 그렇게 절실했던 신분상승의 욕망이 20세기의 플로리다에서도 그렇게 강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맥위치같은 너무나도 빅토리아 풍의 인물이 현대 미국에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까요? 자기 후원자가 누군지 알았을 때 핍이 느꼈던 실망감이 과연 현대에도 그대로 먹힐 수 있을까요?

파프리카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까지 충실하게 원작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빅토리아 풍의 그 어떤 느낌을 느끼려고 한다면 엉뚱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쿠아론은 에이미 헤커링이 [클루리스]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했다고 해야 할 겁니다. 80년 대에 젊은 날을 보낸 한 화가의 이야기를 디킨즈에 접목시키는 것이죠. 영화는 그런 걱정을 할 정도로 원작에 많이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대 착오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딘스무어 여사(미스 해비셤)나 러스티그(맥위치)와 같은 인물들은 사실 좀 이상합니다. 하지만 앤 밴크로프트와 로버트 드 니로가 꽤 그럴 듯하게 연기하고 있으므로 그렇게까지 튀지는 않습니다. [클루리스]에서도 이 정도로 어긋나는 부분은 충분히 많았습니다.

듀나 [클루리스]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클루리스]는고전을 재해석하면서도 20세기 엘에이에 사는 특정 계층의 청소년들에 대한 고찰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클루리스]는 제인 오스틴 만큼이나 20세기에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쿠아론의 영화 [위대한 유산]은 디킨즈의 스토리를 적당히 탈역사적인 공간에 던져 버렸을 뿐입니다.

여기까지는 특별히 불만의 함성을 내지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각본에는 보다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우선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이 '교양소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소설 속에서 핍이 겪는 기대-환멸-좌절은 곧장 그의 정신적인 성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맥위치의 등장이나 에스텔라에 대한 그의 사랑과 같은 요소들은 이런 과정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각본은 이런 요소들을 싹 무시하고 에스텔라와 핀의 러브 스토리로만 영화를 끌고 가려합니다. 아, 물론 이렇게 두들겨 부수어 다시 고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수려면 필요없는 부분은 없애고 새로운 것들을 추가해서 영화 내용 전체가 그 러브 스토리에 봉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쿠아론의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원작에 충실합니다! 영화는 핀의 변모 과정을 시간을 끌어가며 상당히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각성' 부분을 너무 간결하게 처리하고 연애담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아직도 영화의 등뼈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요소가 이상할 정도로 군더더기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거대한 군더더기를 달고 나니 러브 스토리로도 이야기가 잘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겠습니다. 원작을 생각없이 따라가다 보니 핀과 에스텔라의 연애담은 지나치게 차갑고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되지 않은 채로 남고 마니까요. 이런 걸 보고 두 마리 새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경우라고 한답니다.

파프리카 각본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쿠아론의 [위대한 유산]에도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습니다.

듀나 적어도 아주 예쁜 영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파프리카 맞아요. 기네스 팰트로와 에단 호크 모두 예쁜 배우이며, 핀과 에스텔라를 연기한 꼬마 배우들 역시 참 예쁩니다. 엠마누엘 루베츠키가 찍은 화면도 예쁘고, 딘스무어 여사의 헐어빠진 저택인 파라디소 페르두토도 예쁜 곳이며, 8할이 센트럴 파크처럼 보이는 영화 속의 뉴욕도 참 예쁩니다. 기네스 팰트로가 입고 나오는 도나 카란의 옷들도 물론 예쁘고요. 그리고 또...

듀나 알퐁소 쿠아론은 로맨틱한 배경에 대한 어떤 집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공녀]에서도 그랬었죠. 그는 19세기 정원 예술가처럼 부서지고 허물어진 낡은 공간에 푹 빠져 있습니다.

파프리카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의 멋진 그림들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듀나 맞아요! 사실 그의 그림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입니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클레멘테의 그림을 홍보하기 위한 데모 테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린 핀이 딘스무어 여사의 화장품으로 에스텔라의 초상화를 그려내는 부분부터 사람들의 얼을 빼놓기 충분하죠. 하긴 좀 지나친 구석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도대체 아이의 작품이 아니니까요!

파프리카 핀이 조숙한 천재였나 보죠.

듀나 좀 슬픈 천재였나보군요. 어른이 되어서도 별다른 변화가 안 보였으니 말이에요.

클레멘테의 그림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클레멘테의 그림을 다루는 방법에는 조금 실망했습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영화는 훨씬 근사해졌을 겁니다. 적어도 이 영화는 새로 추가할 수 있는 미적 가능성을 그대로 방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핀은 화가이고, 이것은 원작에는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이걸 조금 더 활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영화는 한 예술가의 성장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클레멘테의 그림은 그런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도구가 될 수 있었을테고요. 하지만 영화 속에서 클레멘테의 그림은 단지 영화를 쉬크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파프리카 미넬리의 [삶의 욕망]과 같은 영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듀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어요. [미완성 교향곡]같은 옛날 예술가 전기 영화들처럼 예술가의 작품에 일일이 사생활의 동기를 달라는 말도 아닙니다. 단지 조금 더 입체적으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란 말이죠. 이 영화에서 핀은 그냥 그립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으니까 사실성이 문제가 될 것은 없죠.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뭔가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이에요.

파프리카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면, 영화가 예쁘다는 것이 이 영화의 단점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미오 + 줄리엣]에서 지나친 스타일은 분명 영화의 정서적 요소를 가로막은 장애였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유산]은 나름대로 정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적절한 정서적인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각본 탓입니다.

듀나 배우 탓은 아니고요? 전 에단 호크의 연기가 좀 갑갑했답니다. 이 영화에서 그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지나치게 차가웠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가 에스텔라에 대한 핀의 집착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기를 바랬습니다.

파프리카 그럴 기회나 있었나요? 각본은 그에게 그럴 만한 시간이나 대사를 그렇게 많이 주지도 않습니다. 전 호크가 자기 일을 했다고 봅니다.

기네스 팰트로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만이 없을 듯 한데요? 팰트로는 예쁘고 그 사람의 차가운 아이스 퀸 이미지는 영화 속의 에스텔라와 잘 맞습니다. 에스텔라와 핀 사이에 번쩍 튀는 뭔가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애당초부터 그런 장면이 없고 또 그런게 있었다면 에스텔라라는 캐릭터에 맞지도 않았겠죠.

듀나 데이빗 린 영화에서처럼 후반부에 꽝 터뜨리는 방법도 있었을 것 아닌가요? 이 영화의 결말은 지나치게 밋밋합니다.

제 생각엔 앤 밴크로프트가 가장 좋았던 배우였던 것 같아요. 로버트 드 니로도 잘 하기는 했지만 러스티그라는 캐릭터가 너무 작았습니다. 그리고 조를 연기한 크리스 쿠퍼도 있지요. 매우 공감가고 자연스럽게 연기된 캐릭터였습니다.

파프리카 패트릭 도일의 음악은 군데군데에 삽입된 팝 음악들에 가려져 별로 들리지 않더군요. :-(

듀나 들리는 부분에도 별다른 진보는 보이지 않았어요.

파프리카 참, 질문 있어요. 갤러리 직원으로 잠시 나오는 동양인 엑스트라가 낯이 익던데 혹시 애니 옥 아니었나요?

듀나 네, 맞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서 IMDb를 찾아 확인했는데 정말 그 사람이었어요. 앤 옥이라고 이름이 나와 있더군요. :-)

파프리카 정리해 볼까요? 쿠아론의 [위대한 유산]에서 디킨즈의 걸작의 힘을 바랄 수는 없지만 전 이 영화가 예쁜 영화로서 충분히 기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아무개씨도 자신이 패션 잡지 수집가라는 자명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 점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듀나 예쁜 영화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보그지 책장을 넘기듯 보는 기분도 결코 나쁘지 않고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훨씬 더 정서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유산]은 제 눈과 귀를 만족시켜 주었지만 제 심장까지 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더 슬픈 것은 영화가 그 가능성 정도는 보여주고 있었다는 거죠. 쿠아론의 전작인 [소공녀]가 훨씬 더 만족스러운 영화였어요. (98/06/16)

D&P

기타등등

파프리카 끝으로 서울극장에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제발 영화 끝나기 전에는 그 '6층 영화가 끝났으니 내려가세요' 안내방송 따위는 하지 말아요! 극장 안까지 그 멋없는 목소리가 기어들어와서 분위기를 다 깬단 말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극장이길래 개별 상영관 옆에 화장실도 하나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