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진가신 Peter Chan

주연
케이트 캡쇼....헬렌
Kate Capshaw....Helen
블라이드 대너....릴리안
Blythe Danner....Lillian
엘렌 드제너러스....자넷 홀
Ellen DeGeneres....Janet Hall
제랄딘 맥규안....콘스탄스 스캐터구즈
Geraldine McEwan....Constance Scattergoods
줄리안 니콜슨....제니퍼
Julianne Nicholson....Jennifer
톰 에버렛 스코트....조니
Tom Everett Scott....Johnny
톰 셀릭....조지
Tom Selleck....George
글로리아 스튜어트....엘레노어
Gloria Stuart....Eleanor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 레터]로 가시려면 여기를 누르시고요.)

1.

통설과는 달리, 섹스 자체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에로틱한 경험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맥빠지는 안티 클라이맥스일 경우가 많죠.

그게 우리처럼 영리한 영장류들의 문제점입니다. 상상력이 늘상 현실을 앞지르는 터라, 종착역에 도달하는 과정과 거기에 대한 기대가 주는 즐거움은 종종 실제 결과를 넘어섭니다.

그 결과 로맨스의 흥분은 종종 섹스의 쾌감을 능가하고, 그 로맨스라는 것도 육체에서 멀리 떨어질 때 가장 강렬해질 때가 많습니다. 연애 편지라는 것이 아직까지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남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잘 쓰여진 한 장의 러브 레터는 웬만한 포르노 비디오 서너 박스보다 더 에로틱합니다.

2.

진가신의 첫 미국 영화 [러브 레터]에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도 바로 한 장의 연애 편지입니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이 익명의 편지는 로맨틱한 탱고 음악을 주제가로 깔며 마을을 오가면서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습니다.

편지 내용은 정작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강렬한 존재가 됩니다. 편지의 익명성과 금지된 사랑에 대한 열정은 교활하게 사람들 마음 속을 파고들며 그들의 숨겨진 열정을 들추어 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닫혀진 상상력을 가차없이 풀어놓는 것입니다. 주인공 헬렌이 20살이나 어린 대학생과 그처럼 열정적으로 불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연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섹스 실력이 아니라 로맨스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경계를 넓히는 상상력과 용기입니다. 이 영화가 제공하는 교훈도 그런 것이겠지요. 비아그라 시대를 사는 요새 사람들한테 먹힐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요.

3.

[러브 레터]에서 가장 은밀하게 재미있는 부분은 이 영화에 은근슬쩍 숨어있는 레즈비언 서브텍스트입니다. 이 영화는 스트레이트 러브 스토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게이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사랑에 빠진 두 소녀의 믿을 수 없는 진짜 모험]의 감독 겸 작가인 마리아 마젠티가 이 영화의 각색자여서일지도 모릅니다. 좀 나쁘게 말하면, 이 영화엔 게이 작가가 스트레이트 관계를 묘사할 때 종종 써먹는 그 '잘 봐주는 듯한' 느낌이 숨어 있습니다. 리타 메이 브라운의 '스트레이트' 소설들에 숨어 있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하여간 게이 농담이 상당히 많은 영화입니다. 엘렌 드제너러스가 '스트레이트' 책방 직원으로 나오는 장면부터 그렇지요. 헬렌의 환상에서 맨 처음 연애 편지의 구절을 암송한 사람도 바로 드제너러스가 연기한 자넷입니다. 페미니스트 대학생인 제니퍼의 헤어스타일에서부터 [오렌지만 과일은 아니다]의 제랄딘 맥규완 할머니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끊임없이 암호풀기 식 농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더이상 은밀하게 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드러난 텍스트가 원작인 캐더린 샤인의 소설에서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리아 마젠티의 각색에서만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군요. 샤인의 독자가 불평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으니 아마 전자일 것 같지만요. 그렇다면 마젠티가 각색에 참여한 것도 원작의 스토리 때문이겠죠?

4.

[러브 레터]는 잘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분명한 오해를 지나치게 길게 끄는 스토리는 안이하기까지 하고, 편집의 문제인지 시간 배분은 종종 균형을 잃습니다. 릴리안과 엘레노어의 존재는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고, 스토리에는 복선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흰 이 영화를 즐겼답니다. 왜 이 영화가 그렇게 미적지근한 성과밖에 못 얻었는지 모르겠군요. 이 영화에는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유쾌한 웃음이 있고, 적당히 매력적인 판타지가 숨어 있습니다. 적어도 [러브 레터]는 [런어웨이 브라이드]같은 영화보다 훨씬 그럴싸하게 재미있습니다. (99/01/25)

D&P

기타등등

케이트 캡쇼는 나이를 먹으니까 더 나아 보이더군요. 하여간 이 영화에는 할리우드에서 잠시 유행했던 늙은 남자-젊은 여자 짝짓기처럼 음흉한 느낌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