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용균

주연
김혜수....선재
박연아....태수
김성수....인철
고수희....미희
서하림....옥이
김지은....게이코
손세광....하섭
이얼....성준
사현진...정아

1.

태수

전 한국 영화에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은 외국 작품 제목을 붙이는 게 굉장히 불편합니다. 특히 그 오역이 '색깔'과 연관되어 있을 때는요. [주홍글씨]에서 오프닝 크레딧의 배경이 진짜로 '주홍색'이었을 때, 전 정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답니다. 주홍색엔 성경이나 호손의 소설에 나온 진홍색의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문화에 그에 대응하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분홍신]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예요. 물론 영화가 꼭 한스 크리스찬 아네르센의 원래 비전을 정확하게 따라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홍신]이라는 한국 제목과 [The Red Shoes]라는 영어 제목 사이에서 멀미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게다가 과연 분홍이라는 색이 원래의 빨강만큼 이 영화의 주제에 어울리기는 하는 건지요? 도대체 왜 우리가 문학적 색맹이었던 옛 번역가들의 실수에 아직까지 휘둘려야 하는 건데요?

2.

김용균의 [분홍신]은 빨강구두를 신고 미친 듯 춤을 추다가 자기 발목을 잘라낸 소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막 남편과 헤어진 안과의사 선재와 딸 태수지요. 구두에 집착하는 성격인 선재는 지하철에서 분홍색 구두를 하나 발견해 슬쩍 집에 가져오는데, 구두를 본 여자들은 모두 거기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게 되고 그들 중 몇 명은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분홍신]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40년대에 일어난 치정사건에 바탕을 둔 고전적인 원혼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21세기 초를 사는 직업 여성이 겪는 보다 현대적이고 복잡한 사이코 스릴러죠. 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분홍신을 매개로 삼아 하나로 합쳐집니다.

[분홍신]은 산만한 영화입니다. 반 세기에 걸쳐져 있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려니 아무래도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지요. 뒤에 숨겨놓은 반전 때문에 스토리가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해서 이야기는 더 모호하고 설명이 부족해집니다. 전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언제나 꼭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감정선을 따라갈 정도는 되어야죠. 이 영화엔 그게 없습니다. 그냥 정신없이 산만할 뿐이에요.

영화는 '아름답고 슬픈 호러'라는 목표에도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슬픔을 느끼려면 관객들이 주인공을 동정하거나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져야 하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에겐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선재는 집착과 욕망으로만 구성된 신경질적인 인물이고, 인철은 쿨한 남자주인공 역할을 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디자인된 인물인 데다가 만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여자 주인공에게 멋대로 틱틱 반말을 까는 재수없는 친구고(정말 중간에 "민증 까봐!"라고 외치고 싶어집니다), 태수는... 미운 여섯살이에요. 영화 내내 이 사람들이 하는 건 서로를 향해 고함을 질러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뿐입니다. [장화, 홍련]이 여자들의 히스테리로 가득 한 짜증나는 영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분홍신]은 시도도 하지 마시길.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안겨주는 가장 큰 감정은 슬픔이나 공포가 아니라 짜증입니다.

3.

[분홍신]은 잘 생긴 영화입니다. 블리치 바이 패스와 디지털 색보정으로 채도를 낮춘 화면을 2.35:1로 시원하게 뽑았죠. 영화의 질감은 도회적이고 쿨합니다.

영화는 호러용 아이디어도 꽤 많습니다. 그 중 몇 개는 저도 좋아해요. 특히 지하철 역의 활용이나 두 사건을 하나로 엮어주는 무용수의 사진과 같은 것들은요. [여고괴담]식으로 예쁘지 않은 평범한 외모를 한 여자 조연 배우들의 활용도 좋았고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영화는 여전히 통제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잘 생긴 영화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쿨하게 뽑힌 화면이 꼭 영화의 내용과 어울리는 건 아니죠. 영화는 주제나 효과보다는 인테리어의 탐미적 효과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몇몇 아이디어들이 좋긴 하지만 대부분 영화가 던지는 호러 효과들은 굉장히 진부하고 따분해요. 수없이 봤던 뻔한 효과들을 번지르르하게 닦아서 다시 내놓은 거죠.

4.

배우로서 김혜수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표현력이 풍부하고 테크닉도 뛰어나요. 이전 영화들에서와는 달리 호러라는 장르와도 잘 맞아보이고요. 하지만 지나치게 '여배우'처럼 느껴지는 연기 때문에 종종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캐릭터가 그렇게까지 흥미롭거나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죠.

김성수는 번지르르하게 잘 생겼고 적당히 느끼한데, 그것 외엔 뭔가를 할 구석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냥 기능적인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물론 역이 상당히 재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떻게 되건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마 영화 속에 가장 잘 녹아든 배우는 태수역의 박연아일 겁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 배우라 대사의 테크닉 같은 게 완벽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성인 배우의 자기 과시가 없어서 가장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답니다. (05/06/28)

DJUNA

기타등등

결코 편하게 진행된 시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막 상영되자마자 앞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극장 뒤에서도 들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로 싸웠거든요.

제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예절바른 편은 아니었어요. 앞에서는 영화 상영 도중 계속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굉장히 재수없는 남자 하나가 계속 여자 일행에게 낄낄거리며 뭐라고 떠들더군요. 그것도 주연배우들이랑 감독으로부터 다섯 발자국도 떨어져 있지 않는 데서 다 들릴만큼 큰 소리로요. 나중에 참다 못한 누가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자 그 때서야 잠잠해지더군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런 시사회의 주변 환경 때문에 제가 겪은 짜증이 증폭되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플러스였는지 마이너스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