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4: 목소리 (2005) * * *

감독
최익환

주연
김옥빈....영언
서지혜....선민
차예련....초아
김서형....희연
임현경....효정





영언
파프리카 [여고괴담]이 나온 게 벌써 7년 전의 일입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게 겨우 1년 반 전이야?"라고 말하며 놀랐던 것 기억나요? 세월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은 속도로 흐르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듀나 옛날은 옛날이었지요. 1편과 2편이 나왔을 무렵이라면 90년대 말인데, 그 땐 동네 근처에 멀티플렉스 극장들도 없었던 때거든요. 2편이 나왔을 때도 DVD는 아직 새로운 매체이었고, 외국 영화 DVD의 요란한 서플에 입맛만 다시던 때였죠. 그 동안 참 먼 길을 걸어 왔어요. [여고괴담] 시리즈나, 한국 영화계나, 관객들이나...

[여고괴담] 시리즈가 실제보다 젊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시리즈가 평탄한 직선을 그으며 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작품이 나오는 동안 관객들의 기대와 시리즈에 대한 관점은 계속 바뀌었지요. 아마 지금 관객들이 [여고괴담] 시리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당시 형성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두 번째 이야기] 이후 형성된 시리즈에 대한 기대와 선입견은 이후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였지요. [두 번째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당시 관객들이 가졌던 기대도 또 다른 종류였고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 시리즈는 앞의 영화들을 계속 배반하며 전진해왔습니다.

오늘 다룰 [여고괴담 4: 목소리]도 예외는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익숙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최종 결과나 예술적 지향점은 앞의 세 영화들과 꽤 다르거든요.

파프리카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했던 건 내용보다 태도였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이런 태도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던 [여고괴담] 영화는 없었지요?

듀나 네, 그래요. 하지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죠. 우선 줄거리부터 읊어보는 게 어때요?

파프리카 음악실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하던 영언이라는 소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게 살해당하는 게 영화의 도입부입니다. 다음 날 깨어난 영언은 자기가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령이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영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영언의 단짝 친구 선민뿐입니다. 선민은 영언을 돕기 위해 영언의 시체와 영언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 나서는데, 그러는 동안 죽은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초아를 만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연상되는 작품은 요엘 베리발과 시본 산드퀴스트가 감독한 스웨덴 영화 [인비저블]입니다. 이 영화 역시 갑자기 귀신이 된 주인공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한동안 유행했던 추리소설의 서브 장르인 '귀신탐정물'로 읽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들이 영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하지 못하겠지만요.

듀나 어느 쪽의 영향을 받았건, [여고괴담] 시리즈 안에서 이 설정은 상당히 신선합니다.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공포의 대상은 마땅히 귀신이어야 하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귀신은 오히려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과 상황의 변화 때문에 공포에 떠는 주인공입니다. 물론 학교엔 또다른 영혼이 떠돌고 있지만, 귀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아이디어만으로 영화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기반을 얻습니다.

파프리카 이런 식의 설정은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치지요? 우리의 주인공은 이미 귀신입니다. 공포에 떨고 있고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긴 해도 다시 죽을 일은 없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관객들은 주인공의 육체적 위협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건 일반적인 공포 효과 도구가 이 영화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는 말이 되지요.

초아와 선민
듀나 그리고 영화는 정말 그런 식의 공포효과들을 거의 지워버립니다. 이 영화에는 공포영화의 깜짝쇼가 거의 없습니다. 있어도 중요한 장면들은 아니고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앉아 있고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고 고른 페이스를 유지합니다. 아드레날린 분출을 목적으로 이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은 실망할 거예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전 이런 이야기 전개가 정말 좋습니다. 요새 영화감독들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게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건 아니잖아요?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공포가 있습니다. 어떤 건 자극적이지만 어떤 건 서서히 속옷을 적시는 식은땀처럼 은밀하지요. 게다가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라고 꼭 공포만 자극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장르 공식에 얽히지 않는다면 이야기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파프리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여우계단]이 그런 여유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공포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었다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가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었을지 생각해봐요.

듀나 제작자들도 그런 영화를 만들면서 교훈을 얻었던 거겠죠. 쓸데없이 공포장면들을 넣어 질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다는 거요. 그런 면에서 [목소리]는 선배들이 시행착오로 힘겹게 닦은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파프리카 [목소리]엔 공포효과가 있습니다. 단지 이 영화의 공포효과는 피투성이 깜짝쇼가 아닙니다. 고정되어 있는 설정에서 서서히 흘러나오는 종류지요. 관객들은 귀신 영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은 소녀가 자기 목소리를 듣는 친구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말을 걸고 흐느끼고 공포에 떤다는 설정은 여전히 기분 나빠요. 관객들이 조금만 상상력을 키운다면 이야기 밑에서 서서히 흐르는 차가운 불쾌함을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더 불쾌한 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태도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의 영화들에서 귀신들은 기본적으로 시스템과 집단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영화의 공포스러운 사건 전개는 따지고 보면 멜로드라마틱한 한풀이의 과정이었지요. 관객들과 주인공들은 귀신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 뒤 떠나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엔 그런 감상은 없습니다. [목소리]에서 공포의 대상은 그냥 사악합니다. 냉정하고 야비한 작은 악마지요. 영화 역시 이 존재에 대해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얘를 이렇게 만들었어!"식 설교도 없고요. 전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차갑고 불쾌한 사악함이 [목소리]라는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듀나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전 거의 즐겁기까지 했어요. 이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은 이전과는 달리 집단의 피해자들이 아니라 당당한 욕망의 주체입니다. 아, 물론 심각한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도 있긴 있어요. 하지만 이 영화의 드라마는 얼굴없는 집단이나 학교 선생들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뭅니다.

파프리카 삼각 관계의 한쪽 끝을 차지하는 음악교사 희연이 있잖아요.

듀나 하지만 희연은 이 영화에서 어떤 종류의 권력도 휘두르지 못하지요. 오히려 가장 약한 사람이며 이차적인 도구입니다. 네, 이 영화의 악에는 분명한 실체가 있습니다. 얼굴없는 집단이나 시스템의 부산물이 아니에요.

희연
파프리카 모든 진상이 밝혀지는 중후반 부분이 조금 더 정리가 잘 되었다면 그 악의 모습이 더 잘 드러났을텐데요. 클라이맥스 부분이 너무 간단하게 처리된 느낌도 있고요.

듀나 아, 조용한 클라이맥스는 이해할 수 있어요. 클라이맥스가 너무 요란해지면 지금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지켜온 무표정이 무너져 버리죠. 그 부분의 내용이 조금 더 풍부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냉정한 톤은 영화 전체와 맞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지나치게 말이 많았던 건 치명적이었습니다. 부자연스럽고 급작스러웠지요. 이런 식의 반전을 대사가 아닌 다른 도구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파프리카 전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지나치게 큰 물리적 힘을 준 것도 불만입니다. 제목이 [목소리]인 영화이니 목소리만으로 대부분의 상황을 커버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예요. 몇몇 장면들은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면 지나치게 손쉬워지지요.

듀나 사운드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용한 영화죠. [목소리]에선 일반적인 공포효과와 긴머리 여자귀신들을 대부분 지워버린 뒤 울림이 큰 사운드로 영화 전체를 채웠습니다. 결과는 들쑥날쑥해요. 어떤 때는 지나치게 강요하는 듯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의무적으로 아무 거나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만큼이나 정곡을 찌르는 장면들도 많습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분명한 3차원적인 실체를 갖추고 있으며 종종 섹시하고 유혹적이기까지 합니다. '소리만 들린다' 또는 '소리만 가지고 자신을 알릴 수 있다'라는 설정이 주인공들의 절박함과 고립감, 정체성 위기를 표현할 수 있는 모범적인 도구가 되어주기도 하고요.

거칠 것 없는 사운드와는 달리 이미지는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카메라는 잘 지은 현대식 건물 이곳 저곳을 조용히 오가며 건물 안에 침잠된 고통과 분노의 감정이 조용히 스며나오길 기다리고 있지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건물은 과거의 기억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단지 그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시각 효과는 사족처럼 보였지만요.

파프리카 그러고 보니 각본이 [두 번째 이야기]와 상당히 닮았어요. 사제간의 스캔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 죽은 아이와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려는 아이... 이 역시 허점이라면 허점이겠지요.

듀나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테크닉도 [두 번째 이야기]가 나았어요.

파프리카 배우들은 어때요?

듀나 전 그냥 모범적이고 성실한 [여고괴담] 연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는 배우들에게 씹을 것 이상을 던져주지는 않아요. 이들의 연기는 대부분 정적이고 느릿합니다. 심리묘사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고요. 여전히 테크닉은 필요하지만 경험이 적은 신인 배우들이 자신을 통제할 시간도 그만큼이나 충분한 거예요. 전 이들의 대사처리 방식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마치 얼음 위에서 넘어질까봐 조심하는 아이들처럼 위태로울 수도 있는 대사를 또박또박 성실하게 읊지요.

파프리카 초아 역의 차예련은 좀 손해보는 쪽이더군요. 영화는 초아의 맥거핀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어요. 대사도 관념적이고 어색해서 소화하기 힘들었을 것 같고. 조금 풀어주는 편이 이야기에도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선민과 영언
듀나 전 김옥빈과 서지혜를 구별 못할까봐 걱정을 잔뜩 했는데, 극단적인 설정 때문인지 그렇게 헛갈리지는 않더군요. 게다가 기자간담회에서 보니 둘이 그렇게 닮은 편도 아니더라고요.

파프리카 정리해 보겠어요?

듀나 음, 글쎄요. [목소리]의 가장 큰 성공은 7년이나 된 [여고괴담]이라는 프렌차이즈 안에서 여전히 의미있는 예술적 시도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는 데 있을 거예요. 흥행성까지는 확신 못하겠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야비할 정도로 담담한 영화니까.

첫째 언니인 [여고괴담]이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불타는 운동권 학생 같고, 둘째 언니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비극의 여자 주인공 같으며, 셋째 언니인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여우계단]이 우등생들을 질투하며 지나치게 열심히 노력하는 학구파 소녀 같다면, 이 막내 동생은 늘 교실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학우들을 향해 도끼를 휘둘러 댈 법한 문제소녀 같습니다. 야심없는 소품이지만, 이 새로운 성격만으로도 영화는 시리즈의 새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05/06/29)

D & P


기타등등

홍보자료에 보니 [여고괴담의 법칙]이라는 게 있더군요.

1번, 귀신은 항상 단짝친구다.
2번, 주인공은 항상 맨 끝자리에 앉는다.
3번, 담배 피우는 여고생이 꼭 나온다.
4번, 학교에서 자살한 여고생도 꼭 있다.
5번, 귀신은 항상 복도에서 나타난다.
6번, 주인공에게 시비 거는 불량학생이 꼭 있다.
7번, 주인공은 모두 예체능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렇다면 선민과 초아가 별 이유도 없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온 건 순전히 공식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