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해부 Anatomy of a Murder (1959)

2024.02.12 17:22

DJUNA 조회 수:2060


오토 플레민저의 [살인의 해부]를 보았습니다. 전에 두 번 봤어요. OCN에서 봤던 거 같은데, EBS에서 한 번 봤을 수도 있습니다. 가물가물해요. 둘 다 자막판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제대로 된 화면비율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고.

실화소재 영화입니다. 1951년에 콜먼 A. 피터슨이라는 장교가 모리스 체노위스라는 남자를 총으로 쏴죽였어요. 변호사인 존 D. 보커는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1886년 판례를 무기로 삼아 피고를 변호했고 피터슨은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보커는 로버트 트래버라는 필명으로 당시 사건을 모델로 삼은 소설 [살인의 해부]를 썼는데, 이게 영화의 원작입니다. 나중에 체노위스의 딸은 사건이 실화와 지나치게 가깝고 자신을 포함한 두 여성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출판사와 영화사를 고소했어요. 그러니까 캐릭터 설정, 시기, 장소와 같은 디테일은 다를지 몰라도 사건 자체 실화와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었던 거 같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폴 비글러라는 변호사입니다. 전엔 지방검사였지만 선거에서 지고 변호사 개업을 한 뒤로는 낚시 하고 피아노나 치면서 놀고 있죠. 그런데 프레더릭 매니언이라는 육군 장교가 여관주인 버나드 퀼을 쏴죽인 사건이 일어나고, 아내 로라 매니언이 비글러를 고용합니다. 매니언의 동기는 퀼이 로라를 성폭행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죄판결을 받기 어렵습니다. 판례집을 뒤진 끝에, 비글러는 보커가 그랬던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충동' 판례를 찾아냅니다.

이 영화에는 페리 메이슨스러움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정의로운 변호사이고 피고인은 운이 나빠 누명을 썼다는 선명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린 피고와 아내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퀼이 정말 로라를 성폭행했는지도 100 퍼센트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매니언의 살인 동기도 확신할 수 없어요. 관객들은 딱 배심원들에게 주어지는 정도의 정보밖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는 법정밖의 드라마도 꽤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진상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미국의 사법 제도 시스템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상태로 시스템이 마련해 준 틀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영화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입니다. 영화 후반엔 비글러의 친구이고 역시 변호사인 파넬 맥카시가 여기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지요. 배심원제는 불완전하고 덜컹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그럭저럭 먹힌다고요.

그래도 그 과정이 불안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배심원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온갖 수를 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지요. 지금 보면 평소 품행을 이유로 성폭행 피해자인 로라를 몰아붙이는 검찰 측 태도는 심하게 거슬립니다. 영화는 로라에게 좀 냉소적인데, 그와 별도로 피해자스러움의 전형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로라의 묘사는 오히려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라에 대한 검찰측의 공격은 변호인측에 의해 교정되는데, 과연 이게 늘 그럴 수 있을까요. 만약에 여기에 인종 이슈와 같은 다른 변수가 개입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영화는 비백인 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음악을 맡은 듀크 엘링턴이 카메오로 출연하지 않았다면 전혀 안 나오는 영화가 되었겠죠.)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지만, 분위기는 밝습니다. 여러 모로 능청맞지요. 아무래도 살인사건 당사자들이 아닌, 법조인들이 주인공인 영화라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들에겐 결국 이 모든 게 일상의 일부니까요. 그리고 제임스 스튜어트, 이브 아든, 아서 코넬, 조지 C. 스콧의 연기는 정말 능구렁이 같습니다. 사건의 주인공을 연기한 리 레믹과 벤 가자라도 역에 어울리는 선명한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 그 사람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고 해도 사건의 진상을 확신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아, 그리고 [추락의 해부]가 그런 것처럼 이 영화도 신 스틸러인 강아지 배우가 한 마리 나옵니다.

1959년작입니다. 당시는 할리우드가 그 때까지 유지하고 있던 천진난만한 척하는 위장을 벗고 현실세계에 조금씩 깊이 들어가던 시절입니다. 일단 10년 전만 해도 성폭행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단어들 상당수, 그러니까 '삽입', '강간', '정액', '피임'과 같은 단어들은 나올 수도 없었을 거고요. 아마 지금 관객들은 이 영화가 얼마나 도발적으로 보였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 일부는 코미디로 표현됩니다. 진지한 백인 남자 법조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팬티'의 완곡어법을 찾는 장면을 보면서 안 웃는 게 가능할까요. (24/02/12)

★★★☆

기타등등
아카데미 7개 부분 수상 후보작이었는데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벤 허]가 경쟁작이어서요.


감독: Otto Preminger, 배우: James Stewart, Lee Remick, Ben Gazzara, Arthur O'Connell, Eve Arden, Kathryn Grant, Joseph N. Welch, George C. Scott, Orson Bean, Russ Brown, Murray Hamilton, Brooks West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52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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