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허영의 불꽃'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겨우 챕터 한개를 읽는 동안에도 쏟아지는 뉴욕 지명들이었습니다. 

뒷표지에 서평을 보아하니 뉴욕 사회를 묘사한 문학인 것 같은데 브롱스와 퀸즈 간의 느낌 차이를 모르는 제가 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잘나가던 한 뉴요커의 인생에 끼어든 뺑소니 사건, 그의 삶을 덮쳐 온 불행의 끝은 어디인가? 오만과 허영으로 가득한 나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하고 작품설명이 적혀있는데, 글쎄 저는 인간 본성 어쩌고하는 부분보다 '뉴요커'란 단어에 무게를 더 두고 이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욕이 배경인 작품들은 대부분 뉴욕을 빼고 논할 수 없는 느낌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우디앨런의 '애니홀'의 배경이 뉴욕이 아닌 패서디나나 보스톤이였다면 매력이 분명 반감되었을겁니다.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보일 것같기도 해요.

(작품 외적으로도 뉴욕 사투리로 말하지 않는 우디 앨런 자체를 상상하기가 어렵네요.)

이것은 뉴욕과 비슷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인 파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도 적용됩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도 저에게는 파리식 삶에 대한 영화로 보입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보다 이러한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고, '파리 라이프스타일'로 전개된다는게 더 중요해보여요.

뉴욕과 파리는 그 곳에서의 삶 자체가 이야기거리가 되는 도시입니다.

이름난 레스토랑에서 샤또 디켐에 푸아그라를 먹으며 모더니즘에 대해서나 논하는 삶부터

살인적인 렌트비에 그나마도 두세평 남짓하는 열악한 플랫에서 아둥바둥 쫓기며 사는 삶 조차도요.


뉴욕과 파리가 배경인 작품들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난 이 도시를 정말 사랑해!'가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그 도시를 너무 사랑해서 거기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기어코 그 도시의 구석구석에 대한 지식을 뽐내야 직성이 풀리죠.

특별히 '뉴요커'나 '파리지앵, 파리지앤느'같은 대명사로 구분짓기도 하구요.



2.


한번은 친구 두명과 함께 파리 어딘가의 바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테라스 너머로 길을 묻는 어느 관광객과 말을 섞게 되었죠.

제 친구는 그에게 어디서 왔냐를 으레 물으며 우리를 소개하기를, 

'(저를 가리키며)얘는 한국인이고, (다른 친구를 가리키며)얘는 독일인이야. 그리고 나는 파리지앵!'

재미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출신, 다른 친구는 베를린출신이고 서울과 베를린 두 도시 모두 파리 못지 않은 대도시인데 우리만 도시가 아닌 국적으로 소개하는 것이요.

그 '파리지앵' 친구는 능글맞게 웃더니 건배를 제안하며 말하더군요.

'Welcome to my city'


벨리브를 타고 플랫으로 향하는 늦은밤 파리의 골목에서 그는 다시 한번 외쳤습니다.

'WELCOME TO MY CITY!!!'


자전거 핸들에서 두 손을 완전히 떼고 양 팔을 하늘로 힘껏 뻗은 채 소리치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네요.

그렇게 좋으냐?



3.


이쯤되니 그 특별한 '뉴요커', '파리지앵'의 자격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어느날은 파리 몽파르나스 골목의 작은 크레페 식당에서 친구들끼리 이에 대한 유치한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 앙숙이었던 친구A와 B가 그 주인공이었죠.


친구 A는 다소 보수적인 알바니아 로열 패밀리 출신으로 파리의 중심가인 6구에 정착한지 3년즈음 되었습니다. 화가를 꿈꾸었지만 좌절하고 현재는 예술역사학을 공부하며 소르본 대학교에 다니고 있고요.

친구 B는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 어릴때 파리 외곽도시 몽후쥬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몽후쥬와 파리 14구의 애매한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지요. 파리 시내에 직장이 있는 그는 이제 갓 독립하여 회사와 가까운 곳에 플랫을 구하고 있는 중이고요. 좋아하는 영화 감독은 홍상수(!)(한국인인 전 이 친구때문에 홍상수를 알게되었습니다)


나: 어젯밤 파티는 어땠어?

A: 피곤했어. 잘난척하는 파리지앵들 덕분에. 완전 녹초가 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양이가 있어서 손을 내밀었는데 그 애마저 나를 무시하더군. 파리에선 고양이까지 거만해.    

B: 흥. 그러면서 파리지앵처럼 말하고 있군. '난 모든것이 싫어!'

A: 왜 비아냥대는거지? 나는 파리지앵을 욕했을 뿐이야. 니가 아니라. 

B: 무슨 소리야?

A: 솔직히 넌 파리지앵이 아니잖아.

B: 내가 파리지앵이 아니면 누가 파리지앵일 수가 있지?

A: 넌 리옹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몽후쥬에 살고 있잖아. 심지어는 거기 살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B: 그런걸 누가 신경쓰지? 파리는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A: 게다가 너희 어머니는 미국사람이잖아. 넌 특별히 골와즈를 즐겨 피운다고 말하지만 나는 니가 말보로 레드를 좋아하는걸 알고있어.

B: 이봐, 말 조심해.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익명이는 한국사람이야. 김정일이 듣고 있다고.

나: 꺼져.

A: 무튼 니가 파리지앵이라면 나도 익명이도 파리지앵이겠지.

B: 넌 몰라도 익명이는 파리지앵이 될 수 없어. 컴퓨터를 너무 잘한다고!

나: 잠깐만. 단지 파이어폭스에 유투브 다운로드 플러그인을 설치할 수 있다고 컴퓨터 지니어스라면 난 더이상 파리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A: 이 논쟁은 무의미해. 우리는 모두 파리지앵이 아니야. 마침표.

나: 근데 궁금한게 있어. 꼭 파리에서 태어나야 파리지앵인거야? 파리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은 팡테옹 옆에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한명 아는데,     

B: Ayayay! 그 프로그래머와 너는 뭐랄까 전기 컴퓨터 로보트 언어로 대화하겠군.

나: 그는 전형적인 그 '파리지앵'은 전혀 아니었어. 뭔가 설명하기 어렵지만. 심지어 혐연가거든.

A: 단순해. 파리지앵의 뜻은 파리에 사는 사람이야. 그러므로 그는 파리지앵이지. 여기서 태어나기까지 했고. 전형적인 그 '파리지앵'이 아니더라도.

나: 그렇다면 너는 왜 스스로를 파리지앵이라고 간주하지 않는거지?

A: 내 영혼의 고향은 여전히 발칸반도이기 때문이지.

나: ...엇, 근데 B는 어디갔지? 접시위 의 음식이 거의 그대로인데.

A: 1층에서 담배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나: 먹다가 말고?

B: 이래서 내가 파리지앵들을 싫어하는거야.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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