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이야기...

2015.07.01 02:07

여은성 조회 수:1078


  1.이상하게 요즘은 자기 전에 꼭 잡담 글을 하나씩 쓰고 싶어요.


 

 2.지난번에 말했듯이, 서류상 이름을 안 쓰고 어지간한 곳에선 다 여은성이란 이름을 쓰죠. 대학교에 가기 위해 미술학원에 다닐 때였어요.


 미술학원이란 곳은 수능을 본 뒤부터는 전쟁터가 돼요. 필기는 끝났고, 준비할 건 실기뿐이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수능성적표가 떴어요. 원장이 훈련소의 검투사에게 바티아투스가 외치듯 외치기 시작했어요.


 "점수를 속이려 해봐야 소용 없어! 절대 거짓말 하지 마라! 배짱부리지 말고 점수에 맞춰서 대학교를 써야 해! 모두 수능 성적표를 원본 그대로 내 앞으로 가지고 와라!"


 약간 극적으로 쓴 것 같지만...대충 저렇게 말했어요. 약간 의아했어요. 좋은 대학교 원서를 쓰기 위해 점수를 속이고 땡깡을 피는 학생이 있단 말인가? 이 업계엔 그런 멍청한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하고요.


 다행히도 그해 수능은 어려웠어요. 제겐 좋은 일이었죠. 시험이 어려우면 1등급 맞기가 더 쉽거든요. 그런데...잠깐! 그러고보니 성적표에는 제 서류상 이름이 써 있을 거였어요.


 

 3.원장에게 가서 "사실...여은성이란 사람은 없어요. 가명을 썼었어요. 아르센 뤼팽 그 좀도둑이 가명을 썼던 것처럼."라고 하며 원장이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성적표를 내놓는다고 해 봐요. 원장 입장에서 이게 뭐지 싶을거예요. 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힌 성적표를 가지고 가느니,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냥 성적을 종이에 써 가기로 했어요. 원장실에 가서 종이를 내밀었어요. 원장이 말했어요.


 "왜 그냥 성적표를 가지고 오지 않지?"


 그래서 어깨를 으쓱하며 이게 제 성적이 맞다고 했어요. 그냥 귀찮아서 성적표를 가져오지 않았다고요. 원장은 다시 1등급이라고 써 있는 성적표 복사본을 가만히 보다가 "은성아, 이러지 말자."라고 말했어요. 하긴 이해되는 반응이었어요. 저는 공부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성적표 원본을 가지고 오지 않고 그냥 꾸깃꾸깃한 종이에 1등급이라고 써 오면 이상해 보이긴 할 거 같았어요.


 휴.


 진실을 말하기로 했어요. 사실 올해 내내 쓴 이름은 서류상 이름이 아니라고요. 어차피 원본 성적표를 가지고 와 봐야 거기엔 원장이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름이 적혀 있으니, 믿을 수 없을 거라고요. 휴. 원장은 말도 안 되는 최종변론을 하는 앨런 쇼어를 보는 것처럼 가만히 절 바라보다가 말했어요.


 "일단 그림 열심히 그리자."



 4.흠



 5.나중에 입시미술을 했던 얘기를 써볼까 해요. 어쨌든 간단히 말하자면, 아무도 제가 대학교에 갈 거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강사는 지나가며 제게 "헤이! 입시 끝나면 군대가야지?"하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휴. 뭐 그것도 이해가 가는 게 입시미술은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한데 저는 그 해에 처음으로 입시미술을, 그림 공부를 처음 시작한 거라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 거였어요. 그런데도 절대 서울이 아닌 대학교는 쓰지 않으려 했으니 강사들이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했죠. 



 6.하하, 그런데 이걸 어쩌나? 저는 천재라서 결국 가군과 다군 학교를 합격했어요. 그 대학교 원서를 넣는 건 용기도 뭐도 아니고 그냥 기회를 버리는 거라고 학원 사람들이 만류했던 그 학교죠. 휴. 원장은 입시 내내 별로 저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때는 꽤 호감을 가지게 된 거 같았어요. 왜냐하면 아이들과 신경전이 좀 심했거든요. 흠. 그리고 원장이 보기에 좀 엉뚱한 짓을 많이 하긴 했어요. 그게 뭐였냐면...



 7.입시가 다 끝나고 아직 합격자발표는 안 났을 때였어요. 학원의 누구도 제가 대학교에 못 갈 거라고 여기던 시기였는데 사실 전 이 1년이 재밌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란 걸 재미있게 한 거였거든요. 흠. 그래서 원장실에 가서 이 1년동안 재밌게 공부했다고 했어요. 가르쳐줘서 고맙다고요. 당시엔 학원생들 부모도 와서 원장을 갈구고 이번에 합격 못한 탓을 하는 학생도 있어서 원장도 신경을 많이 긁힌 상태였는데 대학교에 못 갈 거라고 여기고 있는 학생이 잘 배워서 고맙다고 하니 좀 이상했을 거예요. 사실 미술 학원이란 곳은 배움의 터전 같은 게 아니라 대학교에 가기 위한 발판일 뿐이니까요.



 8.그리고 가군과 다군 학교를 합격한 후에 합격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갔더니 원장은 진짜로 기뻐해주는 거 같았어요. 지난번에 '그냥 1년동안 가르쳐줘서'인사하러 와줘서 고마웠다는 말도 해주고 제 진짜 이름도 물어봤어요.



 9.대학교에 가기까진 시간이 약간 있었어요. 용돈도 많이-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에서-받고 슬슬 놀고 지내던 2월 어느날 그 학원을 지나가는데 현수막에는 '~~대학교 합격-여은성'이라고 써있었어요.


 사실 현수막은 홍보를 위해 거는 거고 여은성으로 이름을 걸었다가 누군가 확인 전화라도 해보면 학원의 신뢰에 금이 갈 텐데 그래도 여은성이라고 써줘서 좋았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반 장난으로 다른 이름을 이름을 쓰고 다니던 거였는데, 그 순간은 처음으로 그 이름이 서류상 이름을 제치고 현실에 나타난 순간이라고 여겨졌어요.


 흠.


 위에 말했듯 자기 전에 꼭 글을 괜히 쓰고 싶곤 해요. 40도 술을 마신 날은 더 그렇고요. 오래 전 쌓아올렸던 작은 조각 하나를 돌아보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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