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6 12:33
요즘은 텔레비젼을 보지 않아요. 훨씬 더 재밌는게 많은 세상이죠. 이를테면 게임이랄지, 게임이 아니라면, 가령 게임이랄지...
일일드라마를 가장 열심히 보던 시절은 말년 병장때에요. 다들 일 하러 나가면 바퀴벌레처럼 내무반에 숨어 있다가
동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KBS의 "TV소설" 시리즈를 봤죠. 6~70년대 시대극인데, 시커먼 이십대 남자애들이 앉아서는
"어머, 어떡해..." 해 가면서 열심히 봤죠. 저희 잡으러 온 주임원사 님도 앉아서 다 같이, "저, 저, 쳐죽일..." 해 가면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챙겨 본 일일드라마는 "아내의 유혹" 이에요. 학습실이나 중도에 남아있던 사람들끼리 역시 삼삼오오 모여
과방 텔레비젼 앞에 과자 두고 침 삼켜가며 봤죠. 눈가에 점 찍고 나왔을 때 웃었냐고요? 전혀요. 마징가의 출동을 보는 심정이었어요.
어제 간만에 일일드라마를 봤어요. 절간 같은 식당에서 밥 먹으며 봤는데, 내용은 대략 이래요.
남자(안재모 분)가 바람이 났어요. 났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겼는지 불륜녀와 대판 싸우고 있네요. 곧 아내에게 빌러 오겠죠?
그 와중에 여주(강성연 분)에게는 잘 생긴 총각이 들이대요. 총각은 물론 건실한 청년이죠.
한편 어떤 역할인지 양희경 씨가 로맨스를 위해 자식이라는 한 때 바통, 현재 허들을 발로 차고 있어요.
희한한 건 '고성' 이에요. 인물들이 5분 간격으로 성대결절 생겨라 악을 써요. 순두부 얹힐 뻔했어요.
무슨 얘기를 조근조근 하는 법이 없어요. 엄마를 불러도 "엄마" 하고 부르지 않아요. "엄뫄아!!!" 하고 꼭 소리를 질러요.
그걸 듣는 엄마도 마찬가지에요. "아들" 하고 부르지 않아요. "아드을!!!" 하고 소리를 질러요. 전투가족이에요.
가만 보고 있으니, 저녁 시간대 일일드라마는 4~60대 여성들을 위한 소프트 포르노에요.
멀끔한 청년이 아줌마 좋다고 매달리고, 시니어들에게도 로맨스가 만발하고, 남자는 박살이 나요.
그리고 소리를 질러요. 내키는 대로 막 질러요. 요 포인트가 재밌어요.
서로 소리를 지르고 나면 휴전협정이라도 맺어진 듯 일단 양자 모두 한 발씩 물러나요. 소리 지르고 급 얼음!
땡! 을 외쳐주기 위해 레프리 역할을 할 인물이 옆에서 대기 중이죠.
그러고 보니, 일일드라마는 전형적인 희극의 구성을 하고 있어요.
집단의 평화를 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하고, 헤게모니를 쥔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죠. 절대적인 빌라인도 등장.
이 와중에 집단을 대표하는 선남선녀가 로맨스를 꽃피우고, 안타고니스트는 흔히 반대를 해요.
갈등은 점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가 종영이 가까워 오면 갑자기 인물들이 화해를 합니다.
"ㄷ" 모양으로 거대 밥상을 두고 앉아 하하호호 식사를 같이 하고나면, 갑자기 서로를 향해 애정의 고해성사를 합니다.
악당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꾸라져요. 이사회 한 번에 툴툴 거리며 물러나거나 회사가 무너지고, 그것도 아니면 뒷목잡고 으악!
피날레는 결혼! 그리고 작가는 여주의 입에 경천동지하고 산천초목 벌벌 떨 대사를 물려 줍니다.
"OO씨, 우리 신혼여행에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함께 가요." (저 자를 잡아다 뇌를 열어 보아라!!!)
저 구성은 제가 호호 할배가 되었을 때에도 유효할 것 같아요.
실장님이 본부장님이 됐고, 건설사가 유통사로 바꼈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그때도 시어머니와 며느리일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욕을 오지게 먹었어도 임성한 씨가 난사람은 난사람이에요.
눈에서 레이져를 쏘게 할 줄 누가 알았어, 그래?
2015.10.06 12:39
2015.10.06 18:02
2015.10.06 13:52
으하핫 일일드라마를 몇년째 보게 됐는데 임성한 임성한 하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레이저 같은 신박한 아이디어(!)도 그렇지만 욕하면서 보게 되는 매력은 아무 드라마에나 있는 게 아니더군요. 심지어 이 드라마는 몇달동안 그 생난리를 치면서 죽일둥살릴둥 하더니만 결말은 화해와 화합으로 해피엔딩입니다. 나름대로 그래 잘됐어 다들 잘 살겠지 하고 후련하게 끝나거든요. 그에 비해 착한 드라마라고 나오더니 재미도 감동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고 결말까지도 뭐여 싶은 경우도 꽤 있어요. 그런 드라마 보다보니 이래서 임성한 드라마를 찬양하는구나 싶었어요.
2015.10.06 18:04
2015.10.06 14:17
채널 돌리다가 케이블에서 재방해주는 '어머님은 내 며느리' 라는 일일드라마를 한편 봤는데 설정이나 캐릭터가 아주 그냥....(.....)
(처음 결혼한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을 했는데 알고보니 재혼한 남편은 재벌 회장의 숨겨둔 늦둥이 혼외자식.. 그런데 시어머니는 재벌 손자랑 재혼.. 그래서 촌수로 조카며느리가 됨..)
그런데, 시어머니를 저런 나쁜 캐릭터로 그려도 되나? 시어머니 연령대의 주부는 버리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10.06 18:06
2015.10.06 18:16
이거 제목도 그렇고 캐릭터 설정도 그렇고 막장의 향기가 솔솔 풍기는데 출근전에 잠깐씩 보니까 참 재밌더란 말입니다.
흔히 막장 드라마라 하면 1) 상식을 뛰어넘는 소재 2) 개연성 없는 자극적인 전개 일텐데요,
1)은 모르겠지만 2)는 확실히 아니더라고요. 생각보다 끄덕끄덕하면서 보게됩니다. (1)은 뭐... 어떤 분들한테는 [루킹]이 막장 드라마겠죠)
꿀잼이에요. 추천합니다. 크크크
2015.10.06 16:26
고향 갈 때마다 아부지가 틀어 놓으시는 사극들(시골 케이블 방송은 채널을 돌려가며 하루 24시간 내내 이런저런 사극을 볼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을 같이 즐기며 못 보는 제일 큰 이유가 꽥꽥대는 고함 소리때문이었어요. "즈어언흐아아!! 스엉은이 마응극하옵니다아!!!" 이런 거요. 아무래도 귀가 상대적으로 어두운 노년층을 공략하려면 볼륨을 키우는 것도 답이겠다 싶었지만 제 귀는 아직 평안을 바랄 뿐이라...ㅠㅜ
마지막 문장이 뭔가 살짝 이해가 안가서("안 그래?"가 와야 할 것 같은데) 가만 더 읽어보니 "알았어그래"로 붙여쓰니 이해가 되네요.
2015.10.06 18:08
2015.10.06 17:07
2015.10.06 18:11
2015.10.06 18:33
필력이 훌륭하시네요. 입가에 미소 탑재하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듀게 모님이 연상되며.. 글 잘쓰는 분이 참 많으시구나 싶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