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5 04:31
어느새 사월이 다 가고 아쉬운 마음에 봄에 관한 시를 찾아보다가
김영랑 시인의 시가 무척 마음에 들어 <영랑 시집>에 실린 것 중
봄 기분이 나는 짧고 고운 시들을 몇 편 가져왔어요.
꿈밭에 봄마음
굽어진 돌담을 돌아서 돌아서
달이 흐른다 놀이 흐른다
하이얀 그림자
은실을 즈르르 몰아서
꿈밭에 봄마음 가고 가고 또 간다
떠날아가는 마음
떠날아가는 마음의 파름한 길을
꿈이런가 눈감고 헤아리려니
가슴에 선뜻 빛깔이 돌아
생각을 끊으며 눈물 고이며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이길래
내 숨결 가볍게 실어 보냈지
하늘가를 스치고 휘도는 바람
어이면 한숨만 몰아다 주오
숲 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숲 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 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새워 버렸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왼통 수줍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이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 구름 피워 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대 감기었대
땅거미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우를
고요히 실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이뇨
임의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다 못 돌아오는
먼― 지난날의 놓친 마음
저녁때 외로운 마음
저녁때 저녁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어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밤사람 그립고야
밤사람 그립고야
말없이 걸어가는 밤사람 그립고야
보름 넘은 달 그리메 마음아이 서어로와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그리메: 그림자
황홀한 달빛
황홀한 달빛
바다는 은(銀)장
천지는 꿈인 양
이리 고요하다
부르면 내려올 듯
정든 달은
맑고 은은한 노래
울려날 듯
저 은장 위에
떨어진단들
달이야 설마
깨어질라고
떨어져 보라
저 달 어서 떨어져라
그 혼란스러움
아름다운 천동 지동
호젓한 삼경
산 위에 홀로
꿈꾸는 바다
깨울 수 없다
달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다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 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물 보면 흐르고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흰 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쓰런 눈물에 안겨
흩어진 잎 쌓인 곳에 빗방울 들 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 흘러가건만
그 밤을 홀로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 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서 떨어지거라
같은 시도 수록된 시집에 따라 현대어로 바뀐 정도가 조금씩 다 다른데
읽는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 현대어에 가장 가까운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2017.04.25 07:17
2017.04.25 09:27
저도 모르는 단어가 많지만 청출어람 님이 어떤 단어를 찾아보신 걸까 궁금해하다 몇 개 찍어봤어요. ^^
정확한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싶네요.
1) 훤뜻 - 언뜻 2) 시닷긴 - 시달린 3) 서어로아 - 서러워 4) 어이면 - 어찌하면 5) 홀히 - 홀로
다른 시인들의 봄시도 마음에 들어서 조금 가져왔어요.
봄
김기림
4월은 게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춤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종달새
윤동주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 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갑자기 많은 시인들이 찬양하는 종달새 가수의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
2017.04.26 22:46
2017.04.25 09:16
봄은 금방 가요 길어 오래 있어서 잊어 그렇기도 할까요.
마음 아파지지 않으면 봄이 갑니다.
2017.04.25 09:39
올봄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가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가버리는 것 같아요. ^^
꽃싸움
한용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2017.04.25 09:45
한용운님 꽃싸움 너무 좋네요.
2017.04.25 09:58
좋다고 하시니 신이 나서 한 편 더~ ^^
봄은 전보도 안 치고
김기림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 없는 산허리를 기어오는
차소리
우루루루
오늘도 철교는 운다. 무엇을 우누.
글쎄 봄은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저 차를 타고 도적과 같이 왔구려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골짝에서 코고는 시냇물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해는 지금 붉은 얼굴을 벙글거리며
사라지는 엷은 눈 위에 이별의 키쓰를 뿌리노라고
바쁘게 돌아다니오.
포풀라들은 파―란 연기를 뿜으면서
빨래와 같은 하―얀 오후의 방천에 늘어서서
실업쟁이처럼 담배를 피우오.
봄아
너는 언제 강가에서라도 만나서
나에게 이렇다는 약속을 한 일도 없건만
어쩐지 무엇을―굉장히 훌륭한 무엇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애서
나는 오늘도 괭이를 멘 채 돌아서서
아득한 황혼의 찬 안개를 마시며
긴―말이 없는 산기슭을 기어오는 기차를 바라본다.
2017.04.25 11:58
좋아요 언제나지만 시인의 마음이란 참 그런 생각이 드네요.
2017.04.25 13:04
요즘 봄이 오는 줄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 없이 지내다가
봄을 노래한 시들을 읽어보니 아, 봄이 참 아름다운 계절이구나 싶어요. ^^
초록 기쁨―봄 숲에서
정현종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무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즈시 주고 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2017.06.01 22:09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