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스포일러는 없게 쓰려는 편이지만 제 기준으로 스포일러가 아닌 것이 다른 분들에겐 스포일러일 수도 있다는 하나마나한 경고를 미리 달아봅니다.



1.

(썸네일도 약간 그런 것 같은데 영화를 보다 보면 자꾸만 스티븐 연의 얼굴에서 김준호와 장혁이 떠오릅니다)


메이햄(그러고보니 왜 정식 제목은 '헴'이 아니고 '햄'으로 표기해 놨는지 모르겠네요)은 제목 그대로 영화가 그냥... 뒤죽박죽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영화가 별로였다는 얘기는 또 아니구요. 그냥 영화 속 상황이 시종일관 수습 불가의 난장판 분위기로 흘러가거든요.


기본적으로 '더러운 세상 물에 찌들어 살던 평범한 소시민이 인생의 큰 위기를 계기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를 깨닫고 갱생하게 된다'는 아주아주 고전적인 교훈담을 틀로 삼고 있는데. 정작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그런 건전한 주제와는 전혀 안 어울려 보이는 피칠갑 학살극입니다. 그냥 봐도 안 어울려 보이는데 실제로 영화를 보고 있어도 그렇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래서 이런 부조화가 영화 속 난장판 구경 기분에 일조를 합니다.


또... 정말 난장판이다 싶은 이유 중 하나가, 전반적으로 좀 덜컹거리는 부분들이 많아요.

이야기의 기본 설정인 '8시간 동안만 인간의 자제력을 증발시킨 후 깔끔하게 사라지는 바이러스' 부분도 의아한 구석이 많고. 또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물 속 사람들을 정부와 경찰들이 처리하는 방식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구요. 엔딩 이후에 이야기가 수습되는 모양새도 도저히 현실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꼴인지라. 또 위에서 말한 부분들을 이야기의 기본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보더라도 또 그 설정 안에서도 덜컹거리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이야기의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짜증나시는 분들께선 안 보시는 게 좋습니다. ㅋㅋ


하지만 뭐. 처음에 얘기했던 고전적 교훈극 이야기 구조에 대놓고 앞뒤 안 맞고 작가 편할대로 흘러가는 설정이 결합되니 '그냥 우화인 셈치고 봐 주지 뭐'라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게 거슬리진 않았구요. 또 그 안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에 나름 매력적인 디테일들이나 농담들이 많이 깔려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재밌게 봤습니다.


일단 완전한 면죄부를 깔고서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무능하고 비합리적이며 부도덕한 상사들을 마구마구 신나게 때려 죽인다는 설정이 주는 대리 만족의 쾌감(...)이 상당하구요. 또 스티븐 연의 캐스팅이 아주 좋아요. 되게 억울하고 불쌍한 역할이 (사실 내용을 잘 보면 그렇게까지 억울할 인물은 아닌데도) 딱 어울리더라구요. 얼굴 생김새가 약하고 섬세한 느낌이라 미친 놈처럼 웃으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르는 장면들에서 거부감이 좀 상쇄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야기 내내 쉬지 않고 던져는 농담들 중에서 건질만한 것도 적지 않았구요. 시종일관 질주하는 캐릭터들과 이야기의 에너지가 상당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도 장점이구요.


그래서... 남에게 마구 추천하며 칭찬할 영화까진 아니지만. 그냥 가볍게 즐길만한 킬링 타임 영화를 원한다면 후회 없을만한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랬습니다.



2.


루퍼는 - 뭐 다들 아시겠지만 - 시간 여행자를 소재로한 SF물입니다. 

사실 요즘엔 이런 류의 이야기들 중에 거대 예산을 투입한 블럭버스터 영화는 별로 없죠. 80~90년대의 상대적으로 소박(?)했던 시절과는 달라져서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개성 같은 부분으로 승부하는 작은 영화로 만들어지는 느낌이고 이 영화도 그런 류입니다.


사실 진지한 SF로 봐주기엔 기본 설정에 구멍이 참 많습니다. 되게 난잡하고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위에서 얘기했던 '메이햄'처럼 작가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핑계로 어느 정도 오류는 대충 과감하게 무시하고 잡아 놓은 설정이란 느낌이 물씬 나요. 그래도 일단 그 기본 설정만 눈 감아주고 나면 이후 이야기 전개는 나름 탄탄하게 전개되는 편이라서 큰 문제로 느끼진 않았구요.


보면서 좀 재밌었던 부분이, 영화가 은근히 복고풍입니다. 이걸 뭐라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나 행동 방식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고 또 구체적으로 그 시절 시간 여행자 영화 중 아주 유명했던 모 작품이 떠오르는 부분들도 많이 있구요. 

다행인 건 작가가 상당히 괜찮은 센스를 발휘해서 '이거 뭐랑 비슷한데...' 싶은 부분엔 여지없이 적절한 비틀기가 들어가서 진부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기대 이상으로 강하고 또 그걸 브루스 윌리스, 조셉 고든 래빗, 에밀리 블런트 같은 좋은 배우들이 잘 소화를 해줘서 다른 영화의 짝퉁이라는 느낌이나 그냥 장르 클리셰를 이어 붙인 유희적인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사실 되게 팔랑팔랑한 시간 패러독스 놀이 영화를 예상하고 보다가 조금 놀랐습니다. 나름 진지하고 절실한 드라마가 있는 영화였어요.


제가 이 영화의 주연 배우 3인방 모두에게 호감을 품고 있어서 좀 더 좋게 평하고 있을 확률도 분명히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허술하게 대충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다... 는 정도는 말할 수 있겠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딱 하나 좀 웃겼던 건 조셉 고든 래빗의 분장과 연기였는데요.

이 양반이 30년 후엔 브루스 윌리스가 된다는 설정인데 둘이 생긴 게 너무 다르잖아요?

그래서 얼굴 분장을 살짝 브루스 윌리스처럼 하고 나와서는 계속 브루스 윌리스 특유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냅니다.

토끼씨가 나름 소화를 잘 해서 허접한 느낌은 없었지만 일단 그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웃음을 유발해서 아쉬웠네요.



3.

마녀(2018)



박훈정 영화는 안 좋아하지만 일단 iptv에서 무료였고 주인공 역할의 김다미 때문에 봤습니다.

제가 이 분의 이전작을 봤거든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망한 영화 '나를 기억해'에서 주인공 이유영의 아역으로 나왔죠.

분량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과거의 사건이 중요한 영화라 존재감은 있었고. 되게 평범한 듯한 인상인데 보면 볼 수록 매력적인 얼굴이면서 연기도 참 잘 한다 싶었어요. 근데 워낙 비평, 흥행 모두 처참했던 영화였던 데다가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장면들도 좀 거시기한 게 많아서 그런지 '마녀'후의 인터뷰에서 전작 언급은 잘 안 하더군요. 뭐 이해합니다. 저 같아도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을 듯(...)


암튼 영화는 그럭저럭 재밌게 보긴 했는데 일단 여배우 매력이 대략 80%는 깔고 들어가는 듯 싶었고. 전반부 한 시간의 루즈함 때문에 하품하다가 후반의 급전개와 액션 몰빵 때문에 끝 느낌이 괜찮아서 앞부분의 실망을 조금 망각하게 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했구요. 딱히 칭찬할만한 퀄리티까진 아니지만 한국에서 만든 능력자물들 중에 그나마 이만한 완성도도 별로 없었으니 일단 칭찬은 해줘야 하나... 뭐 그랬습니다.


클라이막스의 액션에 대해선... 흠.

일단 마블 히어로물들 중 좀 다크한 버전 같은 영화가 아닐까 싶었는데 의외로 일본산 '능력자 배틀물'의 길을 가는 게 나름 신선했습니다.

미국산 히어로물과 일본산 능력자 배틀물의 정확한 차이가 뭐냐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제 부족한 덕력 탓에 명쾌하게 답변은 못 하겠는데, 그냥 보면 느낌이 그래요. ㅋㅋㅋ 특히 마지막 전투 중에 캐릭터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을 보면 백프로 이건 마블뽕이 아니라 일본뽕인지라.

다만 아쉬웠던 건 기왕 그쪽 길을 간다면 전투 장면을 좀 더 대놓고 과장되게, 그리고 대사도 더 허세 쩔게 해 놓았음 킥킥거리면서 재밌게 봤을 텐데. 그렇게까지 하긴 좀 쪽팔렸는지 감독이 몸을 사리더라구요. 그래서 좀 애매한 느낌.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전반부의 루즈함과 더불어 조민수와 박희순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제 귀를 때려대는 한국 조폭 영화풍 대사들, 그리고 연기들이 참 별로였습니다. 왜 한국 장르물 작가들은 악역들은 무조건 저런 풍의 말투를 디폴트로 잡고 대사를 쓰는 걸까요. =ㅅ=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선 주인공 김다미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기억에 남았던 게 최우식이었습니다.

맨날 헐랭거리는 착한 젊은이 역으로만 보다가 처음으로 악역 연기 하는 걸 봤는데 되게 잘 하네요. 

일본 만화풍 캐릭터라 조금만 삐끗해도 유치찬란 민망해지기 쉬운 역할이었는데 되게 자연스럽게 잘 해치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원래 이종석이 맡기로 했다가 군연기 문제 때문에 하차했다는데, 참 잘 된 일인 것 같아요.


+ '마녀'랑은 상관 없는 얘긴데. '나를 기억해'에서 좋았던 건 이유영, 김다미의 연기 뿐이었거든요. 

근데 신기하게도 이유영과 김다미의 연기가 대략 같은 사람 느낌이 들도록 연결이 됩니다. 위에서 얘기한 '루퍼' 처럼요.

영화가 멀쩡한 영화였다면 당연히 감독의 연기 지도라고 생각했을 텐데 영화가 워낙 망이라 괜히 궁금하네요. 두 배우가 의도하고 표정 연기 같은 걸 맞춘 건지 아님 그냥 둘이 비슷한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건지. 설마 그냥 우연은 아니겠죠. ㅋ



4.

마녀(2014)



개봉 당시 듀나님 리뷰로만 읽고 까맣게 잊고 있다가 위의 마녀(2018)을 보고난 후 문득 떠올라서 '아 그거 나름 호평이었던 것 같은데'라는 기억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재생했습니다. 

그런데 덕택에 되게 재밌게 봤어요. 영화 포스터도 안 보고 예고편도 안 보고 사람들 평가도, 이 영화에 관한 그 어떤 잡담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보다보니 영화의 장르와 성격을 제멋대로 오해해 버려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개!' 같은 느낌으로 봤거든요.

솔직히 제대로 된 정보를 머리 속에 넣고 봤다면 이만큼 재밌게 보진 않았을 것 같아서 '재밌는 영화다!'라고 단언하기 좀 거시기합니다만.


3천만원이라는 어메이징한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적어도 화면 때깔 면에서는 그런 저예산이 별로 티가 나지 않습니다.

대신 배우들이 대체로 발연기... (쿨럭;;)

그래도 주인공 마녀 역할의 박주희라는 배우는 연기도 잘 하고 비주얼도 역할에 되게 근사하게 잘 어울려서 괜찮았구요.

당연하다는 듯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혹은 수습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는 내용의 영화지만 초반에 주인공 마녀의 캐릭터를 상당히 잘 잡아줘서 걍 그러려니... 하고 설득된 채로 봤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들면 골치 아프고 허접해지지만 대충 분위기 따라가며 가볍게 관람하기엔 꽤 괜찮았어요. 긴장되고 무서운 장면들도 많이 건졌구요.


아 뭐... 스포일러 피하려다보니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네요.

그냥 재밌게, 적당히 부들거리며 잘 봤습니다. 


+ 크게 잔인한 장면은 안 나오지만 일상 칼날류(...)로 상처 나는 장면들을 못 견디시는 분들은 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있잖아요. 커다란 대검으로 사람 두 조각 네 조각내는 장면은 잘 봐도 커터칼로 피부 살짝 베는 장면은 고통스러우신 분들.

저도 조금 그런 류라서 중간에 몇몇 장면은 외면했네요. ㅋㅋㅋ


++ 찾아보니 이 영화 감독이 최근에 나와서 멸망한 '여곡성' 리메이크 감독이더군요.

이 영화 보면서 감독 센스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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