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출장이 잡혀서...

2019.04.14 13:21

어디로갈까 조회 수:1285

......다음 주에 난생 처음 아프리카에 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놓고 몇 장 뒤적이기만 했던 엘리아스 카네티의 <모로코 기행>을 읽고 있는 중이에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의식 침잠 용 독서인 셈이죠. 그런데 며칠 째 잡고 있는데도 평소 독서습관에 비해 속도가 영 붙지 않네요. 왜일까요?

책은 마음에 듭니다. 내용 뒤에 카네티라는 개인이 서 있는 게 느껴지는 글이에요. 선명하고, 단정하고, 안정된 자의식이 있습니다. 문장도 좋아요. 세련된 비약이 있으며 압축과 생략이 잦은데도 글이 리드미컬해요. 다만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 - 유럽의 세계사관 - 이 제겐 상당히 거슬립니다. 

(샛글: 서양주의 세계관을 또렷하게 비판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우리나라에서 무시되었던 건 저로서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에 소개된 게 제국주의 비판과 제 3세계, 민족 의식 등이 가열찼던  8,90년대였는데 왜 그랬던 걸까요?  역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팔레스타인이라서 한국 운동권에서 주목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던데 설마 그래서였을까요?) 

이 책 문장에는 "It looks like .... "라는 표현이 너무 자주 등장합니다. 물론 기행문에서 그런 방식 외의 다른 기술형식을 찾기 어렵긴 해요. 'It looks like ...., 그러나 I actually don't know...' 라는 게 기행문의 흔한 기본 양식이긴 하죠.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땅의 삶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I actually don't know), 적어도 자기 나라/고향을 한없이 낯설게만 바라보지는 않는 거니까요.
이방인의 시선은 대담하고 무례하기 마련입니다. 아니, 그런 시선은 어떻게 감춘다 하더라도 마음까지 억누르기는 어려운 법이에요. 따라서 감정과 눈요기거리를 사냥하는 건 여행자의 기본 악덕인 것 같아요.

기행문은 그 공간에 대해 무지해서도 안 되고 통달해서도 안 되는 거겠죠.  무지를 내세운 앎이 기행문의 형식으론 적당할 것 같긴 해요. 
우리는 무지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극적인 사실을 체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무지해서 발견한 진실을 진실로 확신하기 위해서는 이미 무지에서 벗어난 앎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책을 읽노라니 여행자가 지어 보이는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기행문은 모로코의 표정인 동시에 카네티의 지루한 노회의 표정이니까요. 어쩌면 카네티는 기행문을 쓰기 전에 모로코에서 이미 권태롭고 공허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엔 너무나 많은 감상과 이미지들이 공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각자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지가 가장 유용한 지혜인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려나... '본다'는 건 '보인다' 이후에 오는 과정인 거죠. 인간은 '보이는 것' 중에서 다시 한 번 '보기'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본다'는 것을 1차적으로 선택할 수 없어요. 1차 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가능한 건 '보지 않는다' 쪽이죠. 보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는 건 '봤다'는 착각의 미몽에서 깨어나, 마침내 한 번쯤은 '보기'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닐런지.

문득 드는 생각. 
인간은 '각인'의 형식으로만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것. 더 나아가 말하자면, 삶의 실체는 각인의 한 부분일 뿐일 수 있겠다는 것.
(글쎄, 과연 그럴까요? 적어도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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