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해지기.

2011.05.10 02:17

keira 조회 수:1997

(글의 본문은 나중에 지워질 수 있습니다.)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보니 하루 동안 감정의 상태를 대략적으로나마 기록하게 됩니다. 그런데 머릿속 사고 패턴을 명문화해서 남기기 전에는 스스로도 제가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인 줄을 몰랐습니다.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계속 기록을 하면서 체크를 해 보니 제 의식 깊숙이 깔려 있는 것은 뿌리 깊은 자기비하더군요. 저는 제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믿지도 않는 겁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불쑥불쑥 자기 파괴 충동이 고개를 드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나간 일을 반추하는 게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내가 ~했었더라면,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 10년 간 부모님이 내게 요구했었던 감정 노동에 대해 보다 단호하게 NO!라고 말했더라면 좋았겠지요. 아니면 20대 초반에 뿌리 깊은 인간혐오증을 털어내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했더라면 좋았겠지요 등등.

 

하지만 이것들은 다들 너무 오래된 일들입니다. 앞으로 최소한 10년 정도는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고쳐가야 할 일이지요.

그래도 최근의 일 중 무엇인가를 수정할 수 있다면 저는 회사 입사 당시로 돌아가서 제 마인드를 수정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실수를 안 하려고 전전긍긍했던 건지, 왜 잠도 안 자고 일을 해다 바쳤던 건지, 왜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음에도 끊임 없이 실력이 없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던 건지. 내 연차에는 실수를 하는 게, 실력이 없다는 게 그렇게 흠될 일도 아니었는데.

 

오죽하면 직업을 바꿀까 고민하면서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점쟁이 아주머니께서 그러셨을까요. 제발 자기 자신을 좀 볶아대지 말라고. 무리한 분량의 일을 억지로 해다 바치니까 끊임 없이 일이 쏟아지는 거라고.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좋아요. 저는 그때 정말 위안을 받았습니다. 내가 못하는 게 아니었구나,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꽤 괜찮게 해 왔던 건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입사 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2년 정도를 살았던 여파가 결국 올해 닥쳤습니다. 잠도 모자란 상태에서 인터넷 서핑처럼 뇌를 더 혹사하는 방법으로 스트레스 풀이를 해 왔던 게 잘못이었겠지만, 어쨌든 몸도 정신도 고장이 나서 올해 상반기 내내 약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난 세월 동안 나 자신을 완벽하게 방치하고 있었구나 하는 걸요.

 

행복해지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저 자신을 좋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과도하게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그걸 성취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미워하는 걸 그만두려고 해요. 실수를 좀 하면 어때요. 나중에 고치면 돼요.

남한테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벗어 버리려고 노력 중이에요. 어차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인데 집착해서 무엇하겠어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으니 일단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죠.  

 

그렇게 석 달 이상 허우적거린 끝에 세운 올해의 목표는 "내 안의 상처 받은 아이를 안아주기"입니다. 더는 제 자신을 학대하지 않겠어요.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지난 이 주일 동안 바쁘기도 했지만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 끊임 없이 회의하면서 전전긍긍했는데 이 주 만에 본 한의사 선생님이 기겁을 하더라고요. 이 주 사이에 몸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이건 막노동을 하다 온 사람의 몸 상태라고요. 그러면서 존재 자체로 빛나는 나이이니 하나라도 더 추억을 만들어라, 제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하시더라고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병에 관해서는 저는 가족이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제 3자의 충고에서 오히려 더 살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내 가족과 완전하게 가까워질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위안은 꼭 가까운 곳에서만 구할 필요가 없는 거였어요.

갈 길이 멀지만 가고 가고 또 가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한밤중에 센티하게 고백글을 쓴 김에 낮은 자존감이나 마음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들께 주제 넘게 한 말씀 드려 봅니다.

"우리 조금만 더 스스로를 좋아해 봐요."

 

 

p.s . being 님 어디 계신가요? 상태가 좋아지셔서 빨리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본격  being님 소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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