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26 10:57
hubris님이 쓴 첫번째 글 - "낙태와 마약, 성매매와 장기매매에 대한 경제학적 생각"을 읽고 씁니다.
성매매에 대한 hubris님의 글은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납득됩니다. 파는 자와 사는 자 둘 다에게 효용이 증가하는 산업이라는 것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대중들의 시각이 달라질 만 합니다. 제 눈길을 잡아끈 것은, "성매매를 반대하는 논거중에 가장 빈약한 것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성매매를 해도 너는 찬성하겠냐, 라는 겁니다. 제 대답은 단순합니다. 가격이 문제라고.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에 1조라면, 와이 낫?"이라는 사족입니다.
트레이더로서의 hubris님의 입장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hubris님은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족의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궁금합니다. 제 기억에 hubris님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비효율적인 무상급식시스템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코멘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효율성만을 부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hubris님은 블로그에서 서 믿음belief와 신앙faith의 차이를 설파한 책을 번역해 올린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faith)과 믿음(belief)은 한 사물에 대한 두 가지 단어를 의미할 뿐일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미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행중인 종교적 격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faith)은 강철같은 확신의 문제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확신의 여부를 우리가 믿는 사람들 혹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이것은 신학자인 폴 틸리히(1886-1965)가 "궁극적 실재"(ultimate concern)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히브루인들이 "핵심"(heart)이라고 불렀던 문제입니다.
한편 믿음(belief)은
의견(opinion)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불확실성의 정도를 말로 표현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어"라고 말하죠. 믿음은 가벼운 수준으로 가질 수도 있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가질 수도 있지만,
믿음은 존재론적이라기 보다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만, 어떤 것을 신앙할 때는 우리가 사는 데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신앙은 그 사람을 규정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와도 지키는 게 신앙faith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음행한 자는 성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한 사람이라면 그 성경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1조가 아니라 세상을 전부 살 수 있는 금전이라 해도 성매매는 성매매입니다. 악마는 광야에서 천하 만국을 예수에게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했습니다. 그 액수가 조이기 때문에, 경이기 때문에 한 번 엎드렸던 것이라고 예수가 성부에게 변명할 수 있었을까요? 가격이 충분히 높다면, 나의 가족도 매춘을 할 수 있다고, hubris님은 기독교인으로서 자기를 신 앞에서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hubris님이 쓰신 글 셋을 링크합니다.
2011.05.26 13:22
2011.05.26 14:50
2011.05.28 01:39
기독교적 신앙에 의거해서 성매매를 반대하는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막상 구약 예언자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평등과 공의에 관한 외침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겁니다.
소망교회와 순복음교회의 성직자들이 부자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아모스서 2장과 3장 말씀을 주의깊게 읽을 것같습니까?
소망교회와 순복음교회에 모피코트와 명품백을 걸치고 인품좋은 미소를 띄우면서 나오시는 사모님들께서 아모스서 4장의 '바산의 암소들아'라는 부잣집 마나님들에 대한 경멸이 담긴 귀절을 새겨들을 것 같나요?
또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관대한 자유주의적 개신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에 관대하고 동성애자 성직자까지 두기위해서 반드시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反동성애 발언에 관한 문장은 어떻게해서든지 해결하고 가야합니다. 그 구절을 아예 무시하든가, 아니면 동성애에 유리하게 재해석을 하든가 해야합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또 유명한 성경 구절이 바로 겨자님이 인용하신 고린도 전서에 나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장9~10절
만약, hubris님이나 제가 이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근거로 들면서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혐오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겨자님은 좋아하실 겁니까?
물론, hubris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캐무시합니다
게다가, 저 개인적으로는 이 고린도전서를 쓴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습니다.
겨자님이 고린도전서의 한 구절을 이용해서 기독교도인 상대방의 성매매에 대한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그래서 별로 영양가있는 비판이 못됩니다.
일종의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나는 그 구절을 안믿어'라고 선언해버리면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공격도 쉽게 무력화됩니다.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비판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서 어떤 컨텍스트를 끄집어내느냐라는 해석에 대한 싸움이 바로 기독교 2천년동안 벌어진 갈등의 역사였던 점을 떠올리면, 성경 구절의 권위를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인용하는 것은 매우 성급하고 과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