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아테네 학당,

 

- 아시다시피, 미술-특히 서양미술-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꼭 필요해지게 되는 것이 도상학입니다, 문화나 역사 전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술관에서 '이 그림이 대체 지금 뭘 그려놓은 거야!' 중얼거리다가 다음 그림으로 패스하기 일쑤죠; 현대미술은 '아, 이 그림은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과 고통, 부조리함을 표현하고 있어'라고 그럴듯한 말을 동행인에게 주절거리며 잘난 척 할 수라도 있지, 그리스 신화와 고대 우주론을 모르는 사람이 보티첼리의 '마르스와 비너스'를 보며 어떤 그럴듯한 말을 동행인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도상학만이 그림을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예술은 언제나 다양한 방법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시대에 맞게 달리 해석되어야 합니다, 도상학 또한 형상의 의미만을 찾고, 문서화된 자료를 기준으로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몇 백년 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던 중세화가가 그린 그림을, 최소한의 이해가 가능하도록 인문학적 도움을 주는 도상학은 앞으로도 매우 유용한 분야가 아닌 가 싶습니다, 늘 관심은 가지고 있는데 공부하기 여의치 않은 분야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 그렇다고 도상학 얘기를 하려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인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얘기를 하려 합니다, 엄밀히 하면,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하려 하는 것이지만요; '아테네 학당'은 바티칸 궁전에 있는 라파엘로의 방 중 하나인 세냐투라의 방에 있는 프레스코화입니다, 이 그림에는 총 54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라파엘로는 이 인물들이 정확히 누구라고 기록에서 밝힌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알려진 인물들은 전부 여러가지 파편을 모아 대략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 뿐이죠, 그에 대해 연구해 보는 것도 미술사학자라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뭐 그건 다른 얘기고;

 

- 54명 중 학자들 간에 거의 일치를 본 인물들은 총 22명이라고 합니다(많게는 30여명), 밝혀진 22명의 목록을 보실 수 있는 곳(http://en.wikipedia.org/wiki/The_School_of_Athens)은 여기입니다, 이 번호에 따라 순서대로 한 번 이들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죠, 1번, 맨 왼쪽에 위치한, 아이와 함께 있는 노인은 키티온의 제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논의 역설'의 그 제논은 아니고, 스토아 학파의 시조 중 하나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흔히 그렇듯, 우리에게 그의 철학이 제대로 전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편들과 일화만이 전해질 뿐인데, 제논은 철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재밌습니다, 원래 상인 집안의 자식이었던 그는 상선에 타고 있다가 난파를 당해 아테네로 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방에 들어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쓴 책, '소크라테스의 회상'을 읽고 너무 감명을 받은 나머지, 책방 주인에게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책방 주인은 마침 앞에 있던 키니코스(견유학파) 학파의 크라테스를 가리켰는데, 이 책방 주인이 크라테스를 정말로 소크라테스같은 철학자라고 생각했는지, 귀찮아서 마침 지나가던 사람을 찍었는지, 소크라테스를 크라테스로 잘못 들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쨌든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해서 제논은 크라테스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견유학파의 삶의 철학은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라...;;; 가뜩이나 내성적 성격으로 알려졌던 제논은 적응을 못합니다; 크라테스는 제자의 그 성격을 고치려고 콩 수프가 담긴 항아리를 들고 거리를 걸어다니게 했습니다, 제논은 그 항아리를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고, 크라테스는 그 항아리를 내리쳐 깨뜨립니다, 수프가 옷을 적시자 제논은 숨으려 하지만, 크라테스가 그것을 보고 한 마디 합니다, '왜 도망치는 것인가? 뭐 그게 창피한 일이라고!'

 

- 여기에 원한을 품었는지(...), 제논은 이후로 스승 밑을 떠나 여러 학파의 스승들을 만나 배우고, 최종적으로 그의 철학을 완성해 폴리그노토스의 주랑(스토아)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스토아 학파의 시작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전해집니다,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도 그의 철학에 매료되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논은 70살 쯤 자살했다는 게 정설인데, 스스로 호흡을 끊었다고 하기도 하고, 단식을 해서 죽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한 마디는, '죽음아 무엇 때문에 나를 부르느냐, 내가 갈 테다',

 

- 그의 철학은 어떻게 보면 간단명료합니다, 인간의 자기 통제, 자기 인식, 삶과 행복은 무엇인가? '자연과 일치된 삶'이 그가 내세우는 바였고, 그것은 자연 속에 내제된 이성(로고스)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그의 제자들은 강한 윤리적 의식과, 부동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곧 자연과 일치되는 삶, 그것이 그들의 철학이고, 윤리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연주의'는 때때로 과도한 금욕주의와 절제로 흘렀다고 오해 받기도 하지만, 제논과 스토아학파는 누구보다 조화를 중시했던 절충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질서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를 따랐으며, 조화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한 점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랐다. 또 그들은 세계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점에서는 플라톤을 따랐고, 세계에는 목적론적인 끝이 있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 타타르키비츠, 고대미학사), 이러한 점이 혼란스러웠던 헬레니즘 시기와 로마시대 지중해 세계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연속의 인간, 그리고 그 자연속의 인간이 가지는 어떤 '힘'(이성)을 믿었기에, 모든 합리론자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 두 번째 인물, 제논 옆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은 에피쿠로스학파와 쾌락주의로 유명한 에피쿠로스입니다, 그러나 윤리교과서에도 실려 있듯이, 그의 쾌락주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쾌락 추구는 아니고, 삶의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평정상태-아타락시아-를 추구하는 것이 그와 에피쿠로스학파의 목적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물론자였습니다(원자론적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신이 권선징악을 하는 신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신에 대해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그는 불경한 행위라고 생각했죠, 오늘날의 분류에 따르면 이신론자에 가까운 셈입니다,

 

- 그가 여성과 노예까지 받아들이며 공동체에서 추구했던 것, 아타락시아는 흔히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무관심의 철학이라고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서부터, 사회와 공동체를 다스리는 힘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에피쿠로스가 가지는 의의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쾌락에 대해 가졌던 유연한 자세도 또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엄격한 자기제어를 신조로 삼았던 스토아학파는 '쾌락주의자들'이라는 딱지를 에피쿠로스와 에피쿠로스학파에게 붙였지만, 오히려 귀족 정치가였던 세네카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에피쿠로스보다는 더 쾌락을 누렸을 겁니다, :) 라파엘로도 이런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하필이면 제논 옆에 에피쿠로스를 배치한 것은 장난인지, 진지한 아이러니인지, 물론 그건 그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죠,

 

- 요컨대, 쾌락은 악이 아니지만, 도를 넘어서는 쾌락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단순한 진리를 극한까지 몰아붙인 것이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입니다('어떤 사람을 부유하게 하려면 더 많은 재물을 주기 보다는 그의 욕심을 줄여 주어라'), 흥미로운 것은 칼 맑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일반적 차이'라는 것, 맑스는 이 논문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의 차이를 밝히면서 에피쿠로스의 편을 더 들어주고 있습니다, 데모크리토스가 인과관계를 통한 세계의 형성을 중시했다면,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의 우연성을 더 강조했습니다, 즉 그로부터 필연성에 대한 부정이 이끌어져 나오고, 그로부터, (맑스에 따르면)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자기의식의 자연과학으로서 철저하게 수행되었고 완성되었다'라고 높게 평가받습니다, 또한 '철학에 대하여'에서 알튀세르 또한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에 대해 논하면서 에피쿠로스를 그 하나의 예로 들고 있지만, ...이것은 또 다른 얘기이니 여기서는 패스;

 

- 끝으로 에피쿠로스가 한 말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하나 인용해보겠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제자로 추정되는 메노이케우스가 전하는 말입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죽음이라는 상황을 예상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 또한 헛된 일이다. 죽음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죽으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격언 중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어쨌든 헬레니즘 시기에 경쟁하던 철학들은 모두 이렇게 고통의 제거, 행복의 추구, 자기 절제로부터 시작되는 자연의 인식과 조화를 대하는 자세에서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유용한 지침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22명 전부를 한 번에 끝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단 두 명으로도 이렇게 말이 길어지는군요;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테네학당'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으니 다음에 계속 이어서 죽죽 한 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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