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건이었는지는.. 궁금하신 분은 요기 http://djuna.cine21.com/xe/?mid=board&page=12&document_srl=3894582

여튼 이 글은 그 때 이후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불안함을 극복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거라고 봐주시면 되요.

 

그제 밤에 듀게에 글 쓸 때까진 그냥 놀란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 상태였다면,

어제는 놀람이 지나간 뒤에 불안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어요.

일단 그 순간의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서 리플레이가 되요.

날 좇아오던 발걸음 소리라든가 내가 확 밀었을 때 내 손에 닿았던 패딩의 감촉.. 그런게 다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 담엔 만약 상황이 더 안 좋았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앞으로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하면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뭐 그런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었죠.

 

무엇보다 제게 놀라웠던 건, 집 밖에 나가는 게 꺼려졌다는 거였어요.

뭐 평소에도 일 없음 집에 콕 들어박혀 있곤 합니다만, 어제는 나가야 했던 일도 양해를 구하고 그냥 집에 있었어요.

집에서 거의 한 5분 거리? 그 쯤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나가면 왠지 또 마주칠 것만 같고,

그냥 그 일이 일어난 길 근처에도 가기가 싫었어요. 심지어 그 길 너머에 벚꽃이 만발하였는데도

벚꽃 구경 가고 싶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벚꽃 따위는 제게 전혀 감흥을 주지 않을 지경;;

전에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게 성폭력생존자이자 철학교수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성폭력 경험과 철학적 주제들을 엮어서 풀어쓴 책이거든요.

거기 보면, 자신이 신뢰하던 세계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어제서야 제가 그 말의 뜻이 조금은 느껴지더라구요.

그 길, 낮에는 자주 다니던 길이예요. 그 길 따라 걸어가서 투표도 했었고;;

그런데 그런 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잘 납득이 안 되었다고 해야 하나.

여튼 제게는 꼭 우리집만이 아니라 제가 사는 동네 자체가 커다랗게 제게 편안함을 주던 공간이었는데

그게 갑자기 깨어진 거죠.

게다가 그 범인도 이 동네 사는 것 같으니, 제 생활반경 안에서 계속 함께 살아간다는 거잖아요!

 

 

계속 불안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몇 가지를 시도하였죠.

우선 기분전환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웃을 수 있는 TV예능을 하나 보고,

the end님이 듀게에 올려주신 박재범 불후의명곡 플레이어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담엔 아예 그 상황 자체를 붙들고 늘어져 생각하면서 느껴지는 감정을 바꿔보려 했어요.

일단 해 떨어진 다음에는 그 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안전은 지킬 수 있다,

사실 그 길은 오른쪽에는 큰 아파트 단지, 왼쪽에는 산책로가 있어서 언제나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혹여 정말 위급한 상황이 된다면 소리를 질러 주의를 끌 수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범인은 체구가 왜소하고 물리력은 행사하지 않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불안함도 조금씩 옅어지더군요.

별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구청 홈피에 민원글도 열심히 써서 올리고;; (가로등 늘려달라고)

그런 행동들도 제 자신에게는 힘이 되더라구요. 뭔가 대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정감을 주나 봐요.

 

그 범인을 다시 마주칠 수 있다는 것도 처음엔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무서웠는데

이제는 항상 주위를 살피며 다니면서 내가 미리 발견해서 그 놈이다! 싶으면 숨어서 지켜보면서

바로 다시 112에 신고해야지! 널 잡아주마!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괜찮아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집밖에도 잘 나갔다 왔구요. 물론 나갈 때 들어올 때 주위를 획획 둘러보며

살피고 확인하는 걸 반복하긴 했지만.. 그리고 해떨어지기 전에 들어왔구요.

아마 당분간은 늦은 밤이 아니라 해도 해떨어지고 집에 들어가는 건 무서울 것 같아요ㅠㅠ

그치만 오늘 집에 돌아올 때는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동네 벚꽃들을 바라보며

내가 이 동네 풍경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의 공간을

성추행범 따위에게 빼앗기고 두려워하지는 않겠어! 하고 호기로운;; 마음을 먹기도 했습니다.

 

 

여튼 그래도 이만하면 멘탈 수습이 빠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된 것 같아서 스스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의 경험이 경미한 것이었기 때문이겠죠.

이번 일로 새삼 느낀 것이 우리는 참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믿음들을 전제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에요.

나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내가 가는 곳은 안전하고, 내 주위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것이 깨어지는 경험을 한 뒤에, 그런 다음에도 다시 그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와 의지가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다시 세상과 사람을 신뢰할 수 있으려면, 외부에서 주는 긍정적 에너지가 필수적일 거에요.

충분한 지지, 이해, 사랑 등등.

 

뭐 그런 생각들을, 오랜만에, 새삼,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피부에 와닿게 하였답니다.

무서운 세상이지만, 그 무서움과도 싸워가야 하는 거겠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면 훨씬 덜 무섭고요. 

듀게분들의 따뜻한 댓글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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