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재경동문회였는지 신입생환영회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비슷한 시기였고 여튼 학기 초였다. 부어라 마셔라 3차까지 내달리고 생존한 몇몇이 새벽까지 영업하는 학교 앞 주점에 마지막으로 모였을 때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놈의 술기운 때문에 난 얼마전 작별을 고했던 토리3호 얘기를 꺼냈다. 토리3호는 아름다운 흰색 바디에 최첨단 방열기능과 USB 3.0기능이 첨가된 1TB급 외장하드였다. 그 안에는 겨울방학 동안 웹하드에서 열심히 끌어 모은 어른동영상과 미드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꾸게겍'하는 소리와 함께 토리3호가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 안에 있던 그녀들도 의미없는 0과 1로 변해버렸다. 츠보미도 아오이도 몬부란도... 내 얘기를 듣던 이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그만큼이나 뜨겁게 나를 위로해줬다. 특히 경수 형은 내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울지. 태어나서 한 번.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한 번. 그리고 야동데이터가 날아갔을 때 한 번... 그 맘 내가 잘 안다. 외장하드 관리는 그래서 잘 해야 하는 거야."
무심한 마지막 한 마디에 나는 그동안 말 못하고 고이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토리 1호와 2호에 대해서도 털어놓고 말았다. 토리 1호는 고교시절부터 함께한 녀석이었고 2호는 소셜커머스 할인으로 염가에 구매했었다. 그리고 둘 다 어느날 갑자기 영면에 들어 '복구불가' 상태가 되었다. AS문의에도 회사측은 동일제품 교환 얘기만 할 뿐 데이터 복구에 대해선 책임지지 못한다고 했다. 전문업체에서 복구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당장 학비 마련도 빠듯한 가난한 대학생에겐 사치스런 옵션일 뿐이었다. 거기까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경수 선배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잡아 끌더니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넌 하드디스크 관리에 젬병인 것 같구나. 너 하드 에이징은 제대로 한 거냐?"
하드를 무슨 에이징을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선배는 정색을 하며 하드관리 개론 강의를 시작했다. 본래 하드란 공장에서 나올 때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다. 충분한 에이징을 거치지 않으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나의 토리들처럼 쉽사리 뻑이 나버릴 수 있다는 게 선배의 주장이었다. SSD가 아닌 이상 하드디스크의 가장 큰 적은 '정전기'와 '진동'이었다. 이 두 요소로부터 가능한 안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하드디스크 에이징'의 핵심이라고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전용 케이스를 사용하는 게 좋아. 핸드폰도 케이스를 씌우듯이 진동을 가능한 줄일 수 있는 우레탄 소재로 옷을 입혀주는 거지. 규격제품이면 저가 케이스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장인이 직접 만드는 수제품을 쓰는 게 좋지. 접지도 중요해. 외장하드 접지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하나는 진동을 줄이기 위한 접지지. 좋은 케이스는 하단에 파이크가 달려서 진동을 세밀하게 조정해주거든. 다른 의미는 정전기야. 생활 속에서 노출되는 정전기나 기기 작동 중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미세전기를 밖으로 빼줘야 고장을 예방할 수 있지 그러기 위해선 A사의 전용 USB케이블을 사용하는 게 좋아. 가능하면 본체에도 USB카드를 따로 달아주는 게 좋고."
그러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접속한 Hi-HDD 액세서리 전문점 사이트에는 적게는 2만원에서 비싼 것은 수 십만원에 달하는 외장하드 케이스와 USB케이블들이 있었다. 선배는 금도금한 USB 케이블이 안정적이며 데이터 손실도 막을 수 있다고 그랬다. 한참을 듣고 있자니 괜히 솔깃해졌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개털이나 다름 없는 내 처지를 늘어놓자 선배는 이해한다는 듯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 그냥 이런 게 있다는 걸 말해주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투자하는 만큼 효과를 보는 게 하드에이징이고 Hi-HDD의 세계야 특히나 디자인이나 설계처럼 중요한 데이터를 외장하드에 넣고 다니는 전문가들은 아무리 큰 돈을 쓰더라도 안전하게 외장하드를 관리하려고 하거든. 뭐 아직은 초보니까 저가제품부터 차근차근 써보는 것도 좋지. 일단 써보면 확연히 다른 걸 느낄 거야. 부수적으로 전송속도라던가 미디어파일 재생시 음질/화질 개선 효과 같은 것도 체감할 수 있을 거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급한대로 말이야 내가 에이징 프로그램을 줄게."
선배의 말에 따르면 공장에서 출하된 상태의 불안정한 외장하드를 안정시키고 성능을 개선시키는 소프트웨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하드 에이징 소프트웨어(HAS)인데 정품은 20만원 정도 가격이지만 선배에게 불법 복제판이 있으니 날이 밝으면 자취방에 가서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선배의 방으로 갔고 그 즈음에서 필름이 끊겨 버렸던 것 같다.
이 모든 게 조금 전 노트북 바탕화면 한 귀퉁이에 놓인 낯선 단축 아이콘을 보고서야 떠오른 것이다. 아마도 선배방에 가서 설치했던 모양인데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콘을 클릭하자 프로그램이 실행된다. 미디로 만든 조잡한 시작음과 함께 화면 가득히 UI가 펼쳐진다. 디스크 조각모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성의 실행화면 상단에 프로그램 이름이 적혀 있었다.

'Harddisk Observer for General User'

나도 모르게 대문자로 표기된 머릿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선배의 악질적인 농담일까? 궁금해하면서 택배로 받은 토리4호를 노트북 USB단자에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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