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전설의 용사

2013.02.10 01:10

clancy 조회 수:1238

전설의 용사

clancy

'당신만이 해낼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천희의 귓가에 멤돌았다.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 잡는다. 천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아마도 조금 전 내던져지면서 입안 어딘가가 터진 모양이었다. 

원형 경기장을 둘러싼 군중들을 향해 양팔을 흔들며 반응을 유도하던 적은 천천히 몸을 돌려 천희 쪽으로 돌아섰다. 2미터가 넘는 키에 130kg의 거구는 코뿔소를 연상시키는 딱딱한 거죽과 거대한 근육을 걸쳐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모니터 앞에 앉아 게임 캐릭터나 끄적이는 일로 밥벌이를 하던 천희에겐 너무나도 벅찬 상대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은 그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집과 회사를 제외하곤 인간관계랄 것도 없이 챗바퀴 돌듯 지루한 인생을 살던 그가 35 생일을 맞아 과감하게 지른 것은 고작해야 14박 15일짜리 외계휴양지 패키지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여행사 이벤트에서 50% 할인권에 당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태양계 정거장에서 출발해 초광속으로 다시 하루 반을 날아가던 여행사 우주선은 불행하게도 우주폭풍을 만났다. 요란한 진동과 경고음 속에 오들오들 떨다가 혼절한 천희가 다시 깨어난 곳은 여행사 직원조차 처음이라는 외계행성이었다.

'별자리로 봐선 목적지랑 멀리 떨어진 것 같진 않아요'

그렇게 고객을 안심시키려던 가이드 설명의 핵심은 웅얼대듯 짓뭉개던 뒷부분이었다.

'아마, 1,2광년 정도....'

추락에서 살아남은 건 천희와 가이드 둘 뿐인 듯 보였다. 다른 승객이나 파일럿은 시신조차 확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낯선 외계 행성을 반나절이나 헤매었을까 둘은 외계종족에게 포획되었다. 거대한 덩치에 흉복한 야수를 연상시키는 외모에서 한 눈에도 호전적인 전투종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노예시장으로 짐작되는 장소에 끌려갔을 때 천희 일행은 이 행성의 두 번째 원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라캄'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놀랍게도 지구인과 흡사하게 생겼고 언어 역시 고대 영어였다. 밤새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강 이 별의 역사가 정리되었다. 라캄인은 아마도 오래 전에 이 별에 잠시 거주하던 고도로 발달된 또 다른 문명에 의해 지구에서 강제 이주된 인류의 또 다른 계파 같았다. 그들은 역사로 기록된 바로는 대략 1000년 전부터 이 별에서 살고 있었고 세계를 '판다라'라고 칭하고 있었다. 반면 흉물스런 외모의 거구들은 수 십년 전 이 별을 침범한 외계종족이었다. 가이드는 그들이 전설로 전해지는 우주 최강의 전투종족 '샤이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밤의 가운데 천희는 그녀를 만났다.

라캄인 에르시아...

그가 심심할 적 종이에 끄적거려보던 상상속의 이상형을 현실로 옮긴 듯한 외모의 여자. 그녀는 가장 규모가 큰 라캄인 나라의 귀족이었다. 하지만 가족사냥을 나왔다 길을 잃어버렸고 그만 위험지역까지 흘러들어와 샤이칸들에게 잡혔던 것이다. 서로 조금씩 어긋나는 어휘들을 어렵게 짜맞추며 둘은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만간 노예로 팔려 평생을 착취당해야 할지도 모를 끔직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35년 평생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던 모태솔로 천희에겐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기적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사랑은 남자를 강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시장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천희는 간수의 눈에 재를 뿌려 틈을 만들고 에르시아와 함께 도주를 단행했던 것이다. 울창한 숲과 험한 계곡을 달려 샤이칸들로부터 도망친 둘은 그날 밤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등에 새긴 문신을 발견한 에르시아는 깜짝 놀라며 그것이 '전설 속 전사'의 표식이라 말했다.

'분명해요, 이건 인류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늘에서 내려와 구원한다는 전사의 표시라고요.'

천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문신은 고교를 졸업하면서 아티스트 폼좀 내겠다며 동네 타투샵에서 새긴 싸구려였던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소셜마켓에서 구입한 20퍼센트 할인권을 적용했었고...
하지만 에르시아의 믿음은 견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그녀가 살던 마을로 돌아갔을 때 족장이자 그녀의 아버지는 가보로 전해지던 전사의 옷을 그에게 바쳤다. 그리고 천희는 그 옷이 생경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분명 태양에너지로 가동되는 강화슈트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옷만 입으면 그처럼 비리비리한 인간도 수백키로의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쯤 되자 그도 이것이 일종의 계시란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였다. 전사의 옷을 제대로 시험해보기도 전에 둘을 쫓던 샤이칸 부대가 마을을 습격했다.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하고 가장 앞으로 나서 샤이칸들과 맞선 건 천희였다. 마을엔 샤이칸의 말을 할 줄 아는 통역관이 있었고 그를 통해 천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전사 대 전사로서 모든 것을 건 승부'

전투종족 샤이칸에겐 무력을 통한 일기토가 그 무엇보다 우위에 놓인다는 것을 가이드에게 들었던 것이다. 모 아니면 도인 게임이었지만 천희에겐 강화복이란 카드가 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나와 승부하자. 내가 이기면 너희 종족은 이 별을 떠나는 것이고, 만약 너희가 이기면 이 마을을 바치겠다.'

마을 사람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던진 말이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냥 두면 곧 샤이칸들에게 잡혀 모조리 노예가 될 마당이었으니 달라질 건 없었다. 샤이칸들 역시 비리비리한 천희에게 질 것이란 생각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는 듯 보였다. 그렇게 샤이칸 최고의 전사와 천희의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처음 몇 수는 천희의 생각대로 돌아갔다. 강화복으로 보통의 인간보다 수십배 빨라지고 강해진 천희는 두 배가 넘는 덩치의 적을 상대로 호각의 승부를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로 일이 틀어졌다.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 것이다.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강화복은 곧바로 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얼마 못가 천희는 적에게 두들겨 맞고 헌신짝처럼 내던져지고 말았다. 적은 신이 나서 팔을 내저으며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천희는 에르시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만이 해낼 수 있어요'

그는 예언의 전사였다. 그녀는 수백광년을 날아와 만난 운명의 짝이었다. 그러니 그는 이 싸움을 이겨야만 했다. 경기장에 더 이상 허약하고 끈기 없는 평범한 그림쟁이, 35살 모태솔로 지구인은 없었다. 라캄 예언 속 전사,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구원할 단 하나의 존재만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이며 한 줄기 햇살이 천희를 감쌌다.






'아우, 진짜야. 아무래도 나 턱뼈가 나간 거 같다고. 갈비도 몇 대 나갔고.'

'미안해요. 미안해...'

'그러니까 출력 좀 낮추라고 그랬잖아요. 우리 애들도 맞으면 다치고 부러지고 그런다니까'

가이드는 거구의 샤이칸들이 토로하는 불만에 연신 굽신대며 사과했다. 태생적으로 커다란 덩치에 매섭게 생긴 외모와 달리 샤이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운동신경이 선천적으로 둔한 지라 보기와 달리 싸움 같은 건 젬병이기도 했다. 그들의 종특은 서예나 뜨개질 같은 공에쪽이었지 난폭한 격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쥬얼을 생각하면 그들만한 종족도 없었다.

'치료비는 저희 쪽에서 다 지원해 드릴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슈트 출력 시함 전에 꼭 조절해 놓을게요. 정말 저희도 몰랐어요 그 비리비리한 총각이 초등학교때 킥복싱 학원 다녔다는 걸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하하.'

모든 것은 여행사의 신상품 홍보 일환이었다. 우주선 불시착, 고대 외계종족과의 조우, 그리고 위기에 처한 원주민을 구하는 전설 속 영웅이 되어보는 패키지 상품은 앞으로 여행사의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에르시아 역 아가씨는 어떻게 되는 거요? 총각하고 지구로 돌아갔잖아.'

족장을 연기한 초로의 배우가 궁금하다는 듯 가이드에게 물었다.

'아 그 아가씨 사실은 안드로이드였어요. 지구에 가서 그쪽 부모님들 만나면 사실을 말해줄 겁니다. 애초에 이 상품 체험 신청 했던 게 그 총각 부모님이었으니까요.'

'그래? 허! 참 난 진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연하죠 그거 주문제작한 거라서 엄청 비싸요. 이 패키지의 핵심인데 확실하게 해야지.'

'그나저나 그 총각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네.'

'그래도 15일 동안 좋은 꿈 꾸었으니 그걸로 된 거죠.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하면 그런 사실 다 알면서도 신청하는 사람들로 가득할텐데요 뭐. 그나저나 패키지 옵션으로 라캄인 전통 혼례 참석이나 기우제 주관 같은 걸 넣어보려고 하는데... 회사에서 회식자리 마련했으니까 숙소로 돌아가 한 잔 하면서 얘기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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