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일요일 오후 회사에서

2013.04.28 14:36

01410 조회 수:1678

어제 저녁에 사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ㅇㅇㅇ(을)로부터 문자 받았냐? 아뇨. 을님이 우리한테 뭐 달랜다.

언제까지요? 그게.. 내일 오전이래. 오전이랑 오후 두 개래.

네? 저 지금 서울 나가는 중이라 이메일 확인 못하지 말입니다.

내용이 뭐에요? 우리가 기 보유하고 있어서 위빙할 수 있는 건가요?

고렇게는 못 할 건수 같은데. 실무부서보고 나오라고 해야 돼.

아.. 어쩌나. 알겠슴다. 제가 낼 아침에 나갈게요.

어차피 감사원 건도 있고. 그려 좀 부탁혀... 옙. 걱정마십쇼.


서울의 이곳저곳을 들르고 심야 버스를 탔다.

지친 몸을 끌고 돌아와, 이것저것 땟국물 묻은 육신 씻을 새도 없이 컴퓨터를 켠다.

업무 계정의 이메일은 13통이 와 있다. 나즈막하게 씨이발 개.. 하고 욕을 뱉는다.

석회처럼 딱딱해진 너의 영혼을 해방시켜줘라고 신해철이 머릿속에서 랩을 뱉는다.

기분을 돌려야겠다. 인터넷 뉴스에 무한도전 8주년이라고 해서 뭔가 핫한 모양이다.

그거나 일단 보자고 결제를 한다. 맥주 한 잔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재미있고 완성도는 높은데 차마 웃을 수가 없다. 어째 자학적 재미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래 사는 데까지 버티다가 안되면 확 관둬버리고 한강 뜨자.

라고 생각했는데 예능 한 편이 다시 사람을 다잡는다. 박명수 차장의 대출 연체 문자.

가슴이 서늘하다. 렌트푸어라는 한민족의 컨베이어 벨트에 이미 올라서 버렸으니까.

온 삭신이 쑤시고 피곤한데 잠이 쉬 들지 않고 새벽에 선잠이 들어 뭔가 꿈꾼 것 같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중간중간에 몇 번 깬 것 같다는 자각만 있다. 그마저도 불확실하다.


네 시간 쯤 잔 것 같다. 밥을 대충 말아먹고 회사까지 헐레벌떡 뛰어 왔다.

실무부서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젯밤 무한상사 보고 나서 느꼈던

싸늘하게 식은 생각이 도로 지끈지끈하게 불타오른다. 뭔가 부숴버리고 싶어졌다.

누군가는 현학적으로 반달리즘 어쩌고 하며 표현하기도 한다.

그보다는 그냥 갈 곳 없는 분노를 갖게 되면 그게 일반 성인의 맛이 아닌가 싶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갑님과 슈퍼 갑님들이 열심히 애쓰고 있다.

사회적으로 상생을 하자는 소리는 번드르르한 건 둘째 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선 필요하다.

그런데 덕분에 내 삶의 질은 바닥을 파고 내려가 지하 3,578미터에 도달해 52.3도의 지열을 내뿜는다.

추경예산안에 비정규직을 위한 안배를 하는 건 분명 정치적으로 올바른 무브먼트라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ㅈ같을 뿐이다. 이딴 거 없애버려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나는 이를 지지한다. 근데 ㅈ같다.

그냥 그 소리가 하고 싶었다. 수술하고 나서 반 년 동안 일주일 정도 빼고 (다 더해보면 그쯤은 되지 않을까) 

집에 들어가서 잠만 자고 오며 나이는 먹어가는데 뭐 누군가 만날 시간도 없고 돈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좋아하던 것을 하나도 하지 않다가 보니 어느 새 전부 까먹어 버린 채, 오랫만에 만난 벗과 밥을 먹는데

특정 정보의 분석과 업무 그리고 어떤 세계의 뒷얘기들 외에는 화제를 떠올리지 못하는 나를 알게 되니

아침 욕탕 거울 안에 폼클렌징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찌푸리고 있는 저 괴물을 보고 대체 누군가 싶어졌다.


잠깐 워드에서 눈을 떼고 숨 돌리고 게시판을 본다.

사랑을 못하는 게 운명이고 숙명이고 어쩌고 하는 소리를 게시판에서 본다.

처음엔 측은했고 두 번째는 계속 저러시네 싶었는데 한 일곱번쯤 보니 뭐 할 말이 없다. 일이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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