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용의 눈물이라는 사극에서 고 김흥기가 분했던게 대중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실록은 공이 크다고 인정하면서도 사람됨 등등으로 좀 까는 경향이 있고(당연한걸지도) 죽음을 맞는 부분은 아주 비굴하게 묘사를 해놨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밤에 이야기 나누면서 놀다가 군사가 들이닥치니까 옆집으로 도망가고, 잡혀와서는 '님하가 예전에 정몽주 죽인 덕에 내가 살았는데, 그때처럼 이번에도 살려주세염' 하고 빌었다고. 무슨 사연이냐면 정몽주 일파가 정도전 등 이성계 수족이랄만한 위인들을 살벌하게 탄핵해서 죽네 마네 하는 상황이었는데 익히 아시다시피 이방원이 때려죽여버린 일 말입니다. 그때 이성계가 격분해서 '우리 집안은 충효로 이름났는데 불효자가 나왔다 니가 내 아들이냐?'고 길길이 날뛸 정도였던...


드라마에서는 멋있게 각색을 했습니다. '대조선제국' 드립은 좀 깼지만(이환경;) 비굴하게 굴지 않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는 것으로. 오히려 이방원이 최후로 회유하려고 시도하기도 하는데 '삼봉 아저씨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대사를 어찌나 멋있게 치던지...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 명장면은 너무 많아서 셀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솔직히 왕자의 난 기사는 좀 신빙에 의심도 가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드립까진 너무 멀리 나간거더라도, 좀 납득이 안되긴 합니다. 거사의 명분이 '정도전 일파가 태조 병중인걸 기화로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기에 자위적 선제공격 한거임ㄳ'라는건데... 좀 빈약한 감이 있죠. 왕자들을 한큐에 조지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양반들이 말구종 달랑 데리고 첩 집에 모여서 놀다가 몰살당했다는게 대체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여튼.


그냥 흥미가 가서 실록 기사를 읽어보고 그를 다룬 책이랑 논문을 겉핥기 식으로 읽어봤는데 참 위인은 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동을 치네 마네 한게 주로 부각되는 경향이 있는데, 전 그것도 가병을 흩어서 관군으로 편성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믿습니다. 물론 실록에선 '주원장이 자꾸 소환하니까 무서워서 발악한거임'이라고 까는데 ㅋ 그건 너무 심하죠. 참고로 정도전은 표전문제라 해서 쉽게 말해 명에 글보낸것이 꼬투리 잡혀서 끊임없이 '정도전 보내라 일단 보내라 제발 보내라' 하고 압박이 거셌습니다. 물론 이쪽에선 온갖 핑계를 대며 절대 안보냈고, 대신 보낸 사람중에는 역시 되도 않는 꼬투리 잡혀서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이 양반은 참 보면 뭐랄까... '장차 어떻게 할것인지는 머리속에서 구상 끝났으니까 난 할거고 따라오셈' 이라는 패기가 느껴집니다. 물론 그건 이성계의 밑도 끝도 없는 절대적인 지지가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구요. 


이성계라는 사람도 참 비범하긴 비범합니다. 원래 왕조가 바뀔 정도의 격변기라면 영웅 아닌 사람이 없겠습니다만... 동 세기에 큰 동네에서 나라를 세운 주원장하고 비교해보면 사람이 음험한 구석이 없는, 완전히 호걸의 느낌인데요. 정도전을 대하는 태도도 애틋합니다. 중국가서 신하가 죽는 판이라 자리 내놓고 동북으로 임무를 맡아 갔는데, 이때 이성계가 정도전한테 편지 쓰려다가 '예전에 고려 뭐시기왕은 신하한테 편지보낼때 거사를 자칭했다는데 나도 호를 한번 정해볼까?' 해서 송헌거사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실록에 나옵니다.


다 읽을 깜냥은 안되고 논문이나 책에서 언급하고 다루는 부분을 중심으로 삼봉집도 좀 들춰봤는데, 가끔 전율이 일때가 있어요. 대단하긴 하다 이 사람..


국사 교과서 같은데에 '신권 중심의 국가를 지향' 운운의 몇줄 나오죠. 저는 뭐 엉터리라 제대로 설명이 안되겠지만, 죽 읽어보면 수긍이 가는데가 있습니다. 임금은 신하의 호구 허수아비, 이런 얘긴 아니에요. 이 사람도 유학 공부한 사람이니 큰 틀에서 그 안에 있죠. 이상은 말 그대로 '철인정치'로 현인이 군주가 되면 좋겠지만, 임금의 자질이란게 항상 뛰어날 수가 없다는 냉정한 현실인식을 합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임금이 예스라고 해도 노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재상이 보필해야 한다, 라는건데... 자질이 로또라는건 세습군주의 치명적인 약점인데 그렇다고 그 시절에 민주공화정의 발상이 가능했을리도 없으니 나름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 아닌가 합니다.


아예 이 사람의 유년시절부터 집중적으로 다루는, 주인공 삼은 드라마 한편 만들어도 이야기할게 정말 많아보이는데 그런거 언제 볼수나 있을지. 젊을적부터 인생이 파란만장했거든요. 아예 출생부터가 기구한 데가 있습니다. 이성계랑 만나서 '이 군사로 뭔들 못하겠습니까'라니까 '뭔 말임?'하고 묻자 '아, 그거는 왜구 얘긴데요' 딴청 부리는 장면, 이런거 극으로 꾸미면 멋질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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