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서 자정까지...

2013.06.0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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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휴일 사무실에서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하늘은 어두운 색으로 바림하고 있었다. 미처 숨기지 못한 한 줌 햇살이 서녘에 오렌지 한 줄기 띠를 그리고, 오직 이 찰나에만 허락되는 쪽빛보다도 검푸른 하늘 빛이 아무도 모르게 고요히 펼쳐졌다. 그 하늘은 소(沼)의 물빛보다도 맑고 창해(蒼海)의 심연보다도 깊고 어두워, 그 감청의 바탕에 투영된 빌딩의 실루엣은 언젠가 우주 왕복선에서 전송한 일몰의 사진처럼 신비로워 보인다. 나는 대지에 발을 디디고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데 저 하늘빛은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오묘하다.

도회지의 골목길은 하늘이 바림하는 것을 모른다. 적당 감도 이하의 광량을 파악한 센서의 명령을 받아 도시의 외등이 달동네 아래에 별처럼 뜬다. 누구를 향하여 짖는지도 모를 개 우짖는 소리가 들린다. 전기 압력밥솥이 짓는 미향(米香)에 아이들은 집으로 달음박질친다. 내 어릴 적 동네에서 보던 부뚜막에 나무장작을 때어 동네에 소복하게 쌓이는 저녁 연깃내음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는 없지만, 시간은 일방으로 흘러가 사라져도 삶은 또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것인지.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설핏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눈을 뜨니 어느 새 방 안이 달빛에 흠뻑 젖었다. 유월의 보름은 이름조차 없는 달이지만 밝기는 봄밤 달도 백중(白中)만월이라고 피력하는 듯 대낮처럼 밝다. 저 달빛이 그 옛날에 이태백을 취하게 했고 또 다시 지금에 이르러 나를 취하게 만든다. 그 밝음에 나도 같이 노닐다가 잠시 투병의 시름을 잊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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