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3 23:43
- 올해 10월에 시작해서 어제 끝났습니다. 에피소드 8개에 편당 한 시간 정도. 스포일러는 안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이다 보니 원작자보단 '웨스트 월드 제작진!!'이 더 강조되는군요.)
- 때는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2032년, 장소는 미국 시골 마을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플린은 군대 다녀온 좀 잉여스런 오빠와 시한부라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엄마를 부양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시골 처녀지요. 동네에 위치한 쓸 데 없이 고퀄의 3D 프린팅 가게에서 일하고 있지만 실제 생활비와 엄마 약값은 온라인 VR 게임을 해서 돈 많은 놈들 대신 게임 진도 빼주는 보상으로 조달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때 오빠 계정을 쓰기 때문에 게임 세상 사람들은 다 플린이 아닌 오빠가 절대 고수라고 알고 있죠.
그러다 어느 날 오빠가 수상할 정도로 최첨단의 VR 기기를 가져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뭔지 잘 모를 회사 놈들이 시제품 테스트 좀 해달라고 줬다네요. 이걸로 게임을 열심히 하면 말도 안 되게 큰 보상을 준다고. 뭔가 수상하지만 당장 엄마 약값이 급하니 따질 거 있나요. 게임에 접속하고, 뭔가 되게 수상한 내용의 게임을 한참 하다가 플린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거 아무리 봐도 게임이 아닌 것 같은데...
(돈 벌며 가난과 고통을 간접 체험하시는 우리 금수저 모레츠님... 이라고 하니 꼭 욕하는 것 같지만 전 이 분 좋아합니다. ㅋㅋ)
- 뭐 에피소드 1화만 봐도 밝혀지는 내용 정도도 언급하지 않고 이야기하긴 너무 힘드니까. 딱 그 정도만 얘기 하겠습니다.
당연히 플린이 접속하는 그 세상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 세상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야기가 되겠어요? ㅋㅋ 문제는 그 세상의 디테일이 아무리 봐도 현실 세상이 아니라는 건데요. 이유는 이러합니다. 현실은 현실 맞는데 그게 그냥 현실이 아니라 100년 후의 현실이에요. 100년 후의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어떤 거대 조직, 그리고 그 조직에 대항하려는 어떤 놈들. 뭐 이런 녀석들이 아웅다웅 싸우고 비밀리에 뭘 막 진행하다가 100년 전 미국 시골 처녀 겸 절정의 고수 게이머를 끌어들이게 됐다. 뭐 대충 이런 상황이구요. 이때 플린을 미래의 현실에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준비한 일종의 로봇을 '페리퍼럴'이라고 부릅니다. 그거시 제목의 의미가 되겠죠.
그리고 또 당연히 이 미래놈들의 싸움은 현재(10년 뒤잖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안 그렇다면 오빠나 엄마, 그 외 마을 사람들 설정을 그렇게 열심히 해 놓지 않았겠죠. 그래서 미래의 음모와 현재의 위험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가운데 양쪽 세상에서 정말 빡세게 고생하는 우리 클로이 모레츠씨와 그 가족들, 그리고 미래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라.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줄거리 & 설정 요약을 두 번 한 게 됐군요. 뭐 어차피 편하게 적는 뻘글에 누가 신경 쓰겠습니까만.
(이것이 사이버 펑크다!!! 는 됐고 상황에 비해 표정 너무 해맑고 귀엽지 않으십니까. ㅋㅋ '미드소마'에선 이렇게 귀여우신 줄 몰랐...)
- 넷플릭스도 그렇지만 전부터 아마존 프라임은 묘하게 SF에 진심이라는 느낌입니다. 필립 K 딕을 갖고 '높은 성의 사나이', '일렉트릭 드림' 이렇게 두 편을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고. '테일즈 프롬 더 루프' 처럼 아주 매니악한 SF 시리즈를 굳이 그렇게 고퀄로 만들어 내놓았던 것도 그렇구요. 거기에다 '더 익스팬스'도 있고, 최근에 나온 '아우터 레인지'나 '나이트 스카이'도 있고... 아니 뭐 물량의 넷플릭스를 작품 숫자로 이길 순 없겠습니다만. 들이는 정성에서 좀 차이가 나요. 아마존 쪽에서 나름 유명한 SF 작품들을 보면 취향에 안 맞는 건 있어도 퀄이 구리다 싶은 건 없었다는 기억이거든요.
그런데 또 '그' 윌리엄 깁슨 원작 소설을 '그' 놀란이 참여해서 만들었다니 일단 그냥 확인은 해 봐야할 작품이었던 거죠. 그래서 지난 주에 보기 시작해서 마지막 에피소드가 올라온 어제 마무리했습니다.
(영화, 드라마 속의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커플링이 이제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라니. 세상 참 많이 변했죠.)
- 기대에 맞게 고퀄이라는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여러모로 그렇습니다.
일단 제작비 걱정은 없었나벼? 싶을 정도로 비주얼 측면에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아니 뭐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와 '웨스트 월드' 시리즈로 그렇게 인정 받았던 조나단 놀란이니 충분히 좋은 조건을 보장 받고 제작한 거겠죠. 사아실 이 시리즈의 진짜 주인은 총괄 프로듀서 겸 에피소드 절반을 직접 감독한 빈센조 나탈리(큐브! 높은 풀 속에서!!)에 가깝지만 뭐 일단 네임 밸류로는 그렇겠구요. ㅋㅋ
암튼 OTT 드라마들 중에선 미술 디자인과 CG 퀄리티 양면에서 흠 잡을 데 없이 아주 훌륭한 축에 속한다고 느꼈습니다. 게임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유치하고 구리며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쉬운데 이 작품은 그런 측면에서도 아주 양호한 편이었구요.
(정통 SF의 비주얼을 맛보시죠!!!! ㅋㅋㅋ 누가 '웨스트 월드' 만든 사람들 아니랄까봐...)
- 이야기는... 흠.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일단 윌리엄 깁슨의 원작은 안 읽어봐서 (애초에 한국에 출간도 안 됐습니다) 그냥 드라마로만 이야기하자면, 뭔가 참 조나단 놀란스럽다.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꽤 좋습니다.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우루루 나와서 '나 좀 봐, 입체적이지? 간지나지??' 이러면서 본인 자랑들을 하는데 상당히 납득이 되구요.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위기와 다음 위기와 또 다른 위기들 덕에 중간에 끊기 싫어질 정도로 흥미롭구요. 중간중간 들어가는 액션 장면들도 다 충분히 고퀄입니다. 재밌어요. 재밌는데...
고유 명사들이 좀 많은 편입니다. ㅋㅋ 미래의 이 조직, 저 기술, 그리고 미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런저런 용어들. 이런 게 많이 나오는 편이에요. 그렇게 친절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또 미래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술들과 세력 다툼 관련해서 상황이 늘 복잡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보지 않으면 어느 순간 '아니 내가 뭘 놓쳤지??' 이런 상황이 찾아와요. 그러니까 뭔가 딴 짓 하며 가볍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리즈는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 미래인들은 대화 나눌 때 얼마나 무게를 잡고 얼마나 문학적으로 떠들게요... 티비 화면 저 편에서 놀란이 '집중하라고!!!' 라고 야단치며 째려보는 기분(...)
(인터넷에 짤이 별로 없어요. 그나마 미래스러운 게 이거네요(...) 참고로 이 분은 '블라이 저택의 유령'에서 그 상냥한 집사님.)
- 배우들도 좋습니다. 일단 사실은 초갑부집 딸인 주제(?)에 이상할 정도로 억센 똑순이 역할이 잘 어울리는 클로이 그레이스 모레츠씨가 전형적인 히어로 포지션에서 중심을 잘 잡아 주고요. 제게는 '미드소마'의 그 상냥한 빌런 남친 역할 밖에 안 떠오르는 잭 레이너씨도 평범한 민폐 가족인... 척 하다가 의외로 재밌어지는 오빠 캐릭터를 잘 소화해 주십니다. 그리고 미래 인간님들이 대체로 인상적이에요. 뭔가 좀 패션쇼스럽게 튀는 의상과 드레스 코드들을 하고서 영국식 악센트로 (이야기의 미래 배경이 영국, 런던입니다) 폼을 잡는데요. 요 캐릭터들은 대체로 대사들이 난해하거나 좀 과잉인 느낌들이 강한데 그걸 그냥 비주얼로 꾹꾹 눌러서 납득시켜주십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연기력까진 모르겠어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원체 비현실적이고 괴상할 정도로 과장된 캐릭터들이라 그냥 '어쨌든 간지난다' 정도가 제게 가능한 최고의 칭찬이군요. ㅋㅋㅋㅋ
(100년 후 미래의 영국인들은 이런 옷을 입습니다!!! 100년 전 아님!!!)
- 그런데 뭐, 당연히 예상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죠. 네. 당연히 안 끝납니다. ㅋㅋㅋ "자, 그동안 날 잘도 갖고 놀았겠다? 이제 니놈들도 좀 당해봐라!!!" 라고 주인공이 선언하는 순간이 끝이에요. 허허. 클로이 모레츠가 간지나게 장식해줘서 화는 안 났습니다만. 검색을 해 보니 일단 빈센조 나탈리와 조나단 놀란은 최소 3시즌을 생각하고 만든 이야기라고 하는군요. 차라리 요 시즌 반응이 좀 애매했으면 좋겠어요. 이 놈들이 한 시즌만 더 내고 끝낼 생각을 하도록 말이죠. 어쨌든 이게 이야기 자체가 가면 갈 수록 궁금한 게 많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다음 시즌에 다시 봐요!' 엔딩은 정말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단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에피소드 8개 내내 떡밥 놀이가 이어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진실 등이 밝혀지는 식이다 보니 거의 마지막까지 '재밌군. 재밌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이야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봐도 도대체 다음 시즌에 어떤 식으로 이야기라 흘러갈지 모르겠거든요. ㅋㅋ 말하자면 이야기의 진정한 본체는 아직 구경도 못한 듯한 기분. 끝까지 다 보고 난 후에야 시즌 1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가 가능할 것 같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도대체 이 에피소드 여덟개는 어쩌라는 것이었나, 이런 생각도 좀 들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100년 후라구욧!!!!!)
- 대충 마무리하자면 이랬습니다.
캐릭터도 좋고 때깔도 좋고. 떡밥에 떡밥을 무는 '용용 죽겠지' 전개도 훌륭합니다. 뭣보다 나름 진지하고 하드한 편에 속하는 SF라는 점에서 존재 가치가 있죠. 아시겠지만 OTT 시대 덕에 SF가 나오긴 참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SF를 핑계로 대는 환타지에 가깝잖아요. 이런 궁서체 SF는 좀 드물어요.
그래서 어지간하면, 특히 SF 좋아하시면 꼭 보시라... 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역시나 언제 끝날지 모를 이야기라는 게 추천의 발목을 잡네요.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냥 잊고 사시다가 대략 2년 후, 혹시나 3년 후 쯤에 완결 되면 몰아보시는 쪽을 추천합니다. 지금 보면 입맛 버려요. ㅋㅋㅋㅋ 이렇게 시즌 계속 이어갈 생각이면서 에피소드 8개가 뭡니까... 차라리 에피소드 한 15개쯤 해서 두 시즌으로 기획하면 안 되는 거였니... ㅠㅜ
뭐 그렇습니다. 정통 SF에 목마르신 분들, 그리고 조나단 놀란스런 난해하고 무게 잡는 대화들에 반감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대략 만족하시겠지만, 2~3년 후에 완결 나고 보시는 걸로. 소감 끝입니다.
+ 사실 가장 맘에 들었던 캐릭터는 중반부터 잔혹 살벌한 킬러로 등장하는 이 분인데요.
네드 댄리씨. 뭔가 좀 사이코스런 역할로 한 방 임팩트 남기는 역할을 너무 잘하심요. '픽시', '맨디' 에서 맡았던 역할에 이어 이 드라마에서 맡은 캐릭터도 참 간지나는 미친 놈이었어요. ㅋㅋㅋ
2022.12.04 01:25
2022.12.04 02:21
시즌은 완결됐지만 결말이... ㅋㅋㅋ 웨스트 월드 시즌 1은 그냥 그걸로 끝내도 완벽한 스토리여서 좋았는데요, 이 드라마는 그런 배려와 자비심이 없다는 건 미리 알고 보세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ㅋㅋ
2022.12.04 01:46
클로이 양 때문에 한 번 시도는 해봐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동생 놀란분의 작품이었군요. 웨스트 월드도 용두사미라는 평이 지배적이던데 저는 1시즌은 그럭저럭 흥미롭게 봤지만 이후로 그냥 안봤는데 그래서 승자인가 싶기도 합니다 ㅎㅎ 어쨌든 일단 이건 시즌 2의 반응을 볼 때까지 보류하는 걸로!
잭 레이너 배우는 역시나 미드소마가 제일 임팩트가 컸지만 저는 '싱 스트리트'에서 자신만의 락앤롤 철학을 동생에게 전파하는 믿음직한 형 역할로 처음 기억하고 있어요.
2022.12.04 02:30
확인해보니 웨스트 월드는 올해 시즌 4로 막을 내렸군요. 시청률 폭락 때문이라는데 그래도 끝까지 본 사람들 평은 '어쨌든 마무리는 괜찮았다'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굳이 확인해보지 말고 걍 시즌 1의 멋진 엔딩만 기억하는 걸로... 볼 게 너무 많아요. ㅋㅋㅋ
잭 레이너 출연작 중엔 말씀하신 '싱 스트리트'랑 '글래스랜드'가 가장 호평인 모양이네요. 이 드라마 보다 정들어서 한 번 찾아볼까 하구요. (근데 과연 볼 곳이 있을지가;) 진짜로 미드소마 볼 땐 몰랐는데 눈이 아주 동글동글한 게 귀여운 인상이에요. 출연작 때문에 인상이... ㅋㅋㅋ
2022.12.04 12:11
미드소마에서도 마지막에 그 동글동글한 눈을 열심히 굴리죠 ㅋㅋㅋㅋㅋㅋㅋㅋ
2022.12.04 05:28
2022.12.04 09:38
시즌제 폐지 법안이 시급합니다!! ㅋㅋㅋ 위에 다른 댓글에도 적었지만 웨스트 월드는 시즌 1만으로도 완결성이 있었는데 이건 양심도 없는 엔딩이라 안 보시는 게 이득입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