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3:37
시간을 보내는 일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도서관이나 서점 서가를 돌아다니는 일입니다.
저희 동네 도서관을 뒤지다 multilingual 서가 한 칸에 Korean 코너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한달 전입니다.
실용서 몇권에 소설 몇권이 섞여 서른 권쯤 한글 책이 있어 너무 반가웠습니다.
20대 때 사랑했던 배수아 작가 책도 있어 냉큼 빌려왔는데 생각보다 잘 읽히진 않더라고요.
이번에 빌려온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표지며 제목이 그리 땡기지는 않아서 미루고 있다가 방학을 맞아 한글이 그리워 책을 열었는데
거의 이틀만에 다 읽고는 책장을 덮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서울의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소설을 하나 봤는데 왜 옛날에 시골에서 호롱불에 책 보고 뒷산에서 감자며 나물이며 캐먹고 일년에 한번 목욕하고 책보 매고 십리씩 걸어 학교 댕기고 그런 얘기가 나오니까 아부지 생각 나가지구.. "
"그거 딱 아부지 얘기네"
"또 거기서 큰 형님이 학비도 없이 서울에 대학갔는데 가정교사니 뭐니 고생 하다가 월남에 가요. 거기서 뭔지도 모르고 철모에다 에이전트 오렌지 가루를 받아다 막 뿌려대"
"아이구 그것도 또 내 얘기네. 어떻게 아부지 얘기를 다 안대?"
"아부지가 맨날 가난했던 옛날 얘기하면 듣기도 싫었는데 왠지 막 그 시절이 이해가 돼가지구.. "
이런 저런 얘기를 해드리니까 반가워 하시더라구요.
원래 감정 표현이 거의 없으신 분이신데 은퇴하시구 여성 호르몬의 증가(?) 탓인지 요즘엔 전화 드리면
"응 딸래미 사랑해, 전화해 줘서 고마워" 이런 말씀도 툭툭 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덜컹합니다.
현대사 공부가 미약해서인지 대충 안다고 생각했던 내용들도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고
워낙 걸출한 문체를 가진 분이 본인 경험을 녹여서인지 정말 먹을 게 없었던 60~70년대 농촌의 가난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달까요.
어빠 어렸을 때 말이야.. 로 시작해서 결국 물자 아껴써라, 로 끝나는 아부지 장광설이 정말 귀찮고 한물 간 얘기로만 느껴졌었는데
어쩐지 우리가 정말로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고..
다름 부모님을 한 인간으로서 객관화시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잘난 척 하고 있었는데 실제론 아버지의 삶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한편으론 평범하고 약간 모자라지만 고운 심성의 주인공 김만수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통과하는 스토리에서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기도 했는데요, 두 사람의 인생 은 어찌 이리 다를까 싶어 또 슬픈 마음도 들었네요.
하여간 오랫만에 읽은 한국 소설이라 그랬는지 여운이 길게 남는 글이었습니다.
또 최근 좋은 소설 있으면 추천 부탁드려요..
2015.10.31 15:24
2015.10.31 15:54
2015.10.31 17:40
그렇죠. 전 마동석 닮은 고딩때 친구에 대입해서 그림을 그렸었어요.
2015.11.01 01:45
아이구.. 임시완 김수현 둘 모두 안 좋아하기 힘든 미모의 분들 아닌가요..
황송해 하면서 가슴 저릿하면서 봤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아직 못 읽었는데 어서 구해봐야겠어요.
동영상까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H2에서 영감받은 델리스파이스 <고백> 생각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3N3wYcC5wMk
2015.11.01 09:02
어엇 이 분 뭘 좀 아시는군요. <첫사랑> 읽을 때 bgm은 늘 <고백>이 진리입죠. ㅎㅎ
2015.10.31 15:34
저희 아버지도 연세가 드실수록 굉장히 다정해지시더군요. 뭐 해드릴 때마다 "아이고, 고마워" 하시고
하나도 착하지 않은 일을 해도 맨날 "아이고 착하지" 하셔서 (속으로 '이게 뭐가 착한데' 하고 툴툴 ^^)
그런 말 들으면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아나긴 해요.
아버지와 사이 나쁜 듀게분들은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니 조금만 버티세요. ^^
(대신 어머니가 남성 호르몬의 작용으로 괄괄해지시는 부작용이... ^^)
2015.11.01 01:46
ㅎㅎ 툴툴거리면서 불끈! 알것 같아요. 정말 아부지 힘 빠지셨구나 느낄 때마다.. 안도 20%에 80% 짠함이 믹스됩니다.. ㅜㅠ
2015.10.31 17:22
2015.10.31 17:23
2015.11.01 01:48
고교 교과서에 실렸나요? 아님 언어영역 지문이요? 대단하네요~
저도 교정 본다고 보는데도 글에 오타 넘 많아서 깜놀했네요. 어서 고칠께요 ㅎ
2015.10.31 20:05
외국에 있으면 우리말의 소설들이 많이 그리워지죠. 저도 여행하다 베네치아 숙소에서 이상문학작품집을 반가워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김훈의 '화장'이었어요. 뭘 추천한다기보다 그런 게 좋을 것 같아요. 생각지도 않은 작가들 작품을 하나씩 읽기에는.
2015.11.01 01:53
아시는군요!! ㅜ 된장국에 따순 밥이 고픈 것처럼 한글이 고파지는 순간이 찾아오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만나면 막 허겁지겁 달려들어 배 채우듯 읽습니다. 영어 공부해야 하는데 :) 화장 너무 좋죠.. 그 작품 읽고 김훈 작가 괴물같이 느껴졌었더랬죠. 안그래도 도서관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있어서 다음번에 읽으려고요. 근데 몇권 안되는 서가의 책 금방 다 읽을텐데.. 다음엔 어쩌지.. 막 벌써부터 걱정하면서 아껴읽고 그럽니다. 하하.
2015.11.02 04:22
좋은 글 감사합니다.ㅈ
저도 이런 저런 글로 표현하기가 벅찰때 사진이라도 인화해서 보내려고 짬날때마다 프린트 해서 보내려고 해요. 성석제의 투명인간 읽어봐야겠네요.
2015.11.02 09:37
저도 기억해놓겠습니다.
2015.11.0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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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여기 성석제빠 하나 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건 단편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 실린 <첫사랑>이란 단편인데 그 내용을 갖고 누군가 이런 걸 만들었더군요... 제 상상이랑은 좀 다른 그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임시완이나 김수현 둘 중 하나라도 좋아하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