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6 13:15
영화 허(Her)를 뒤늦게 보았습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소제가 흥미가 있었고 영화적 재미도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속의 근미래(아마도)의 모습이 뭔가 설득력이 많이 부족했던거 같습니다.
주인공 직업은 연애편지 대필작가이고 이 주인공의 직업이 영화의 주 내용과 잘 어울리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탄생해서 인공지능이 생각도 하고 글도 쓰고 학습도 할 수 있게 된다면 주인공은 당장 자신의 직장을 인공지능에게 뺏기는걸 걱정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주인공이 일하는 직장은 LA에 있다는 설정인데 그런 비싼곳에 쾌적한 오피스 환경을 제공하면서 까지 '사람'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비싼 월급을 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샹하이에 찍은 회색빛 도시 풍광은 영화랑 제법 잘 어울리긴 했지만 도시에는 쓸데 없이 많은 오피스 칼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쁜 척 돌아다닙니다.
인공지능이 만들어지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컴퓨터의 활용이 커질수록 그 만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연애편지를 쓸려고 대필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현실이라면 대필로 카톡을 보내겠죠.
썸타는 사람에게 '주말에 바쁘세요?'라고 보내고 계속 '1'이 남게 되는 정신적 데미지를 다름 사람이나 인공지능이 대신 감수하게 하는 서비스가 더 효율적입니다.
'그녀가 내 카톡을 씹은건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카톡대필 인공지능이 구리기 때문이야..' 라며 정신승리.. 잉?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연인 같은 서비스가 있다고 하면 분명 그 서비스는 한번에 결제 되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 요금처럼 월 정액제일겁니다.
이런 서비스를 만든 구글같은 거대 회사와 각 국가의 통신사들이 가격을 담합하고 단통법같은 이상한 법이 끼어들겠죠.
전화 통화 300분 + 데이타 10G + 인공지능 연인 서비스 A타입 하루 4시간 = 2년 약정에 월 150,000 정도 하겠죠.
거기다 각종 서비스가 추가 될때마다 추가 요금이 붙겠죠.
아마 가상의 연인과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할때 가상의 연인이..
'오빠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라고 해서 사용자가 애타는 마음으로
'왜 화난건데? 응? 응?'
..이라고 물으면..
'고객님의 인공지능 연인 서비스의 월사용 시간이 소진되었습니다. 사만다가 왜 삐진건지 알고 싶으면 요금을 충전해 주세요. '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죠.
주인공은 핸드폰을 집어던지며.. '이런 빌어먹을 통신사 놈들~' 이라고 외치면서 비굴하게 요금 충전..ㅠㅅㅠ
'아흑.. 사만다찡~'
암튼 전체적으로 영화가 너무 말랑합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명은 자본논리에 철저하게 맞춰서 진행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넓은 사무실과 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가상의 연인과 연애나 하고 있진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영화가 마음에 안들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철학적인 주제를 아름답게 만든 영화였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냥 현실은 이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냉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01.26 13:47
2015.01.26 13:54
하긴 인공지능이 그렇게 발전했으면 자동차들도 날아다닐법도 한데 말입니다.
2015.01.26 13:56
백투더퓨처의 세계에서는 지금쯤 자동차가 막 날아다니고 그러지요.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안나온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거대 자동차 카르텔의 음모라는..(응?)
2015.01.26 13:59
전 오히려 반대의 논리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더 희소해지는 것들의 가치는 계속 올라가게 마련이니까요. 손편지가 귀해진 지금이지만 택배를 비롯한 우편 서비스 자체는 오히려 늘어났잖아요. 모든게 이메일과 데이타로 소통되는 미래일수록 오히려 손편지를 쓰거나 이용하려는 수요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게 더 훌륭하다거나 완벽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이 직접 생각하고 써보낸 손편지라는 이유 하나로 말이죠. 이건 일종의 브랜드 같은 것일수도 있어요.. 샤넬이나 루이비통같은 명품 브랜드처럼 그걸 소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소비하는 일종의 상품이 될 수도 있는거죠.
2015.01.26 14:14
저도 영화 보면서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레트로한 감각을 소비하는 부류를 위한 틈새 시장정도로 이해했어요.
암튼 영화의 로맨틱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통신 서비스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요.ㅋ
한국에선 12시 이후에 접속이 불가할 것 같다란 생각도 들구요.
2015.01.26 14:01
기능이 아니라 감성/ 감정의 문제겠죠. 그 결과물이 인공지능이 만든 것과 사실상 차이가 없더라도, 인간이 대필 편지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의뢰자는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요즘 전원주택을 지어 이사가는 어르신들 중에 일부러 아궁이를 만드는 분들이 있다더군요. 관리도 귀찮고 불편한데도 굳이 만드는 건 역시 기능이 아니라 감정(추억) 때문이겠죠.
2015.01.26 17:17
저도 이 부분에서 좀 뜨악했어요.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일수록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것들이 남아 나름 레트로 시장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에는 본인의 경험과 감정이 담겨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요? 손편지라는, 가장 오래되고 내밀한 감정표현의 방법이 자신의 머리와 손에서 나와야 의미가 있는 거지, 남이 써준 편지를 부쳐주는 게 보내는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만약 제가 그런 편지를 받는다면 오히려 기분이 상할 것 같습니다. 이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길래 고맙다는 글 몇 줄도 직접 쓰기 귀찮아서 남에게 시켜서 보내나 하고요.
2015.01.26 17:44
편지를 보내면서 이건 내가 시간이 없어서 혹은 글재주가 별로라서 돈을 주고 남이 써준 편지야 라고 알려주지는 않겠죠 ㅎㅎㅎ
물론 받는사람이 혹시 하고 의심해 볼수는 있겠지만요
2015.01.26 18:14
대필을 밝히지 않는다면 사랑과 감사를 전하면서도 정작 그 대상자를 속이는 셈인데, 아무리 잘 쓴 대필편지라지만 얼굴도 모르는 제3자에게 자기 사생활과 내밀한 감정까지 모두 까발려가며 편지를 쓰게 하고 또 대필편지임이 드러났을 때 벌어질 후폭풍을 감당할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자기가 몇 년동안이나 받아온 연애편지가 실은 남이 쓴 것이고, 또 자기 애인이 대필편지를 위해 그 동안의 연애 얘기를 줄줄이 작가에게 털어놓았다는 걸 알면 이게 좋게 끝나지 않을 듯 싶은데 말이죠. 게다가 후반부에 주인공이 자신이 썼던 대필편지들을 모아 출판까지 하는데, 이러면 뽀록 안 날 수가 없잖아요?;;
2015.01.26 23:27
대필편지를 보고 일본인들이 연초에 교환하는 연하장을 연상했어요.
실은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보내고 받았다는게 중요한거죠.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월정액 부분이 특히 ㅋㅋㅋㅋ
저도 영화 보면서 주인공의 일 부분이 참 납득이 안 가더라만 로맨스영화적인 장치로 넘겼어요.
영화속 근미래 묘사의 장점은 딱 하나, 보통 SF영화에서 하듯이 상상 속 최신기술이나 시스템을 묘사하는 데 힘을 뺀 부분 정도 아닐까 싶어요. 너무 불성실할 정도로 힘을 빼서 인물들이 대체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