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운명이란 있는가?

2015.09.20 21:09

로치 조회 수:2304

대학 동기의 가족들은 집안의 대소사부터 개인의 진로까지 점성술에 의존을 해요.

이것도 나름 종교라면 녀석은 모태 샤먼인 셈이죠. 

아버님은 사주쟁이의 말에 업종을 바꾸셨고, 어머님은 매년 기백을 점 보는데 들이신데요.

녀석도 점쟁이 말아 덜컥 회사를 때려치고 호주로 워홀을 떠나는가 하면,

어느 날은 눈을 찢고 나타났더라니 무당이 눈이 커야 좋다고 했다나요?


무언가에 심취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자꾸 블랙홀처럼 주변 사람들을 끌어 들이려 하죠.

저야 워낙 어릴 때부터 이어 온 인연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때문인지 얘는 친구도 없어요.

그리고 오늘은 그녀에겐 나름 기념비적인 날이 되었네요.

무려 십여 년 간 그렇게 조른 끝에 결국 저를 사주쟁이 집에 데려가는 데 성공했거든요.

복채는 녀석이 내 주기로 하고, 밥과 커피를 몽땅 사 준다는 조건으로요.


이 녀석, 대뜸 "저는 왜 연애를 못 할 까요?" (거울을 봐라, 이 년아)

부터 시작해서 이직이니 뭐니 잔뜩 묻더라고요. 

저는 별로 궁금한 게 없었어요. 당연하죠. 전 내내 사주쟁이의 관상을 보고 있었거든요.

그 양반, 사연있어 뵈네...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녀석에게는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 주던 사주쟁이


제 생일을 종이 위에 막 적더니 표정이 심상치 않아요.

결론적으로 제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하하하.

일단 과거를 읊어서 기선 제압을 하려 들더라고요.

성격이니, 집안 환경이니 하는 건 베... 무슨 효과렷다 하고 넘겼는데,

제가 군 시절에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요. 그거 맞히는 순간에 좀 뜨끔 하더라고요.

(이때 낚였죠.)


사주쟁이 말에 의하면 저는 일단 중년에 되는 일이 없고, 엄니 건강도 염려되고,

50대에 크게 한 번 망했다가, 제 자식은 크게 다쳐서 눈물을 쏟을 예정이라는 군요.

어느새 저는 퍼덕이는 신선한 횟감이 되어 "도사님" 이라고 사주쟁이를 높여 부르며 방도를 묻고 있었죠.

없대요. 길이 없대요. 점 같은 거 보러 다니지 말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래요. 아 나 이런...

마지막으로 예술을 하라는데, 이 양반아 되는 일이 없다면서 예술은 무슨? 캔에 똥 담아 팔까?


요 전에 댓글로 N포세대의 일원이다, 막 혼자 살 거다... 

라고 써놓기는 했지만 제가 성철 스님도 아니고 무슨 욕심을 다 버렸겠습니까?

예쁜 아가씨들 치마자락 보면 싱숭생숭하고 그렇죠. 그런데 심지어 제가 바람기가 세서 결혼해 봐야... 이런 ...

전 완전히 실의에 빠졌고, 녀석이 위로한답시고 사 준 고기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영화를 보여 준다고 하는데 보자는 영화도 하필 "사도".

야, 아까 못 들었냐? 내 자식이 크게 다쳐서 눈물 쏟을 거랜다. 이 망할 자식아!!!!


대게 사주 보러 가면 이렇게 총체적으로 네 인생은 이미 망했음, 하고 얘기를 해 주나요?

그 양반 보기에 내가 다신 안 올 손님으로 보였나? 너무 노골적으로 째려봐서 마음 상했나?

아무튼 맑고 화창한 휴일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졌어요.


아아... 과연 운명이란 있는 걸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00
126071 [왓챠바낭] 전 이런 거 딱 싫어하는데요. '헌터 헌터' 잡담입니다 [4] new 로이배티 2024.04.25 179
126070 에피소드 #86 [2] update Lunagazer 2024.04.25 39
126069 프레임드 #776 [2] update Lunagazer 2024.04.25 40
126068 ‘미친년’ vs ‘개저씨들‘ soboo 2024.04.25 448
126067 Shohei Ohtani 'Grateful' for Dodgers for Showing Support Amid Ippei Mizuhara Probe daviddain 2024.04.25 37
126066 오아시스 Be Here Now를 듣다가 catgotmy 2024.04.25 67
126065 하이에나같은 인터넷의 익명성을 생각해본다 [1] 상수 2024.04.25 220
126064 민희진 사태, 창조성의 자본주의적 환산 [9] update Sonny 2024.04.25 738
126063 3일째 먹고 있는 늦은 아침 daviddain 2024.04.25 104
126062 치어리더 이주은 catgotmy 2024.04.25 173
126061 범죄도시4...망쳐버린 김치찌개(스포일러) 여은성 2024.04.25 293
126060 다코타 패닝 더 위처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악마와의 토크쇼 예고편 [3] 상수 2024.04.25 163
126059 요즘 듣는 걸그룹 노래 둘 상수 2024.04.24 150
126058 범도4 불호 후기 유스포 라인하르트012 2024.04.24 199
126057 오펜하이머 (2023) catgotmy 2024.04.24 83
126056 프레임드 #775 [2] Lunagazer 2024.04.24 29
126055 커피를 열흘 정도 먹어본 결과 [1] catgotmy 2024.04.24 183
126054 [넷플릭스바낭] 몸이 배배 꼬이는 3시간 30분. '베이비 레인디어'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4.04.24 325
126053 프렝키 더 용 오퍼를 받을 바르셀로나 daviddain 2024.04.24 42
126052 넷플릭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감상 [6] 영화처럼 2024.04.24 21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