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넷 - 007

2020.09.07 00:05

Sonny 조회 수:982

Uc-WBp62k-Lven-ZCqw-XPy-Er-F-1200-80.jpg


<테넷>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정말로 007 팬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SF적 개념과는 무관하게 <테넷>은 줄곧 007 프랜차이즈의 스타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간역행이라는 영화의 설정만 빼면 이 영화는 완벽하게 007입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최대 난제는 시간역행이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체 주인공은 왜 그렇게 임무를 어그러트리면서까지 캣을 지키려고 애쓰는가. 답은 이 영화 바깥에 있습니다. 그게 007의 기사도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007은 다른 악당과 남자들은 가차없이 쏴죽여도 여자는 무조건 지키려고 합니다. <테넷>은 007의 섹스중독 기질을 보다 고상하게 감췄을 뿐입니다. 캣은 이 영화의 가련한 본드걸입니다. 사토르도 말이 안되긴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요즘 액션 영화에서 "대놓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당 1명"의 설정이 말이나 되나요. 이것도 007의 익숙한 테마입니다. <테넷> 의 사토르는 007시리즈의 블로펠드입니다.

<테넷>이 007의 변주라는 점은 이런 기본설정말고도 이 영화의 미쟝센에서 드러납니다. 007 시리즈의 가장 큰 변별력은 주인공이 항상 폼을 내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뭔가 근사하고 세련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007 시리즈의 가장 큰 포인트입니다. 액션이나 철학은 두번째 문제입니다. 똑똑하고 몸도 잘 쓰는 전문가 남성이 비밀리에 뭔가를 후딱 해치운다는 그 망상을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이 007의 본질입니다. <테넷>의 주인공은 항상 양복을 입고 다닙니다. 아예 작중에서 대놓고 "재벌들은 그렇게 싸구려 양복을 입고 다니지 않네." "그 양복 잘 안어울리네요." 같은 스타일에 대한 지적이 직접적으로 나옵니다. 007을 오마쥬한다는 걸 의식한 놀란의 자조적 농담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영화가 내 이상형인 007만큼 우아할 수는 없겠지만... 이라며 자신을 낮춰 자신의 아이돌을 높이는 거죠. 놀란은 못생기거나 거친 배우를 기용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테넷>의 닐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미남"의 이미지를 박아놓은 헐리우드 청춘스타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경우 놀란이 추구하는 그 우아한 이미지에 어울리는지 조금 의아하지만, 오히려 그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모든 주역 배우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상류층의 자태를 뽐냅니다. 오히려 너무 뻔해질까봐 더 활동적이고 미국적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기용하면서 놀란은 자신의 기성품 양복 같은 세계에서 활력을 주는 요소로 활용했을수도 있습니다.

<테넷>에는 작가의 취향 말고는 크게 연관이 없는 사치스러운 설정들이 나옵니다. 프란시스 고야의 작품을 찾기 위해 재벌들의 비밀 금고인 프리포트에 간다거나, 사토르가 모는 요트 경주 장면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007의 기본 설정이 "명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겠네요. 명화는 그 자체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있지만 재벌들의 또 다른 화폐 같은 개념이기도 하니까요. 사토르의 개인 소유 요트나 경주용 요트 같은 것들은 어지간한 부자들은 소유하기도 힘든 자산입니다. <테넷>은 인버젼의 개념을 다루지 않는 시간대에는 이런 호화로운 사물들로 스크린을 채우면서 이 작품의 세계가 굉장히 비싸고 특별한 계급이 향유하는 것이라고 인식시킵니다. <테넷>은 세계평화를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세계를 지배하는 이들의 최고급 작전입니다. 단지 판돈으로 세계가 걸려있을 뿐입니다.

<테넷>에는 007에 없는 한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우정입니다. 007은 거의 모든 것을 소유한 남자가 딱 하나 소유하지 못한 것, 여자를 소유하는 이야기입니다. 악당은 007이 그 여자의 소유를 안전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위험요소일 뿐입니다. 007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이야기입니다. 남성적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죠. 007이 고독한 남자의 일과 연애라면 <테넷>은 고독한 남자의 일과 연애와 우정입니다. <테넷>에는 007에는 없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007의 남자 주인공이 재력가 이미지와 교양으로 이성을 유혹할 때, <테넷>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친구를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친구는 그런 식으로 지배할 수 없으며 007의 연애는 사실 관계라기보다는 하룻밤의 구매에 가까우니까요. 감동받을 수 밖에 없는 동료애. 어쩌면 이것은 영국적인 로망을 이야기하는 007 시리즈와 미국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놀란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0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5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70
113336 Jiri Menzel 1938-2020 R.I.P. 조성용 2020.09.07 265
» 테넷 - 007 [6] Sonny 2020.09.07 982
113334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예상수 2020.09.06 558
113333 대사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도 재밌군요 [2] 가끔영화 2020.09.06 678
113332 테넷 - 감독으로서의 야망 [8] Sonny 2020.09.06 1056
113331 비혼과 선택... [2] 안유미 2020.09.06 776
113330 돌비 애트모스 지원 헤드폰 구입했습니다! (fea. 반일불매운동) [3] 얃옹이 2020.09.06 929
113329 듀나in) 고전 크리처물 영화 질문(개발새발 그림첨부) [8] 메피스토 2020.09.06 514
113328 주말, 연락할 사람들 안유미 2020.09.06 374
113327 아비정전을 보고 있어요. [8] 하워드휴즈 2020.09.06 577
113326 네플릭스 영화 생각하지 않으려해 2020 독특하네요 [3] 가끔영화 2020.09.06 816
113325 바낭ㅡ다음 뉴스에 댓글 5000개 썼네요 [3] 가끔영화 2020.09.05 571
113324 반도를 보았습니다. [4] 분홍돼지 2020.09.05 686
113323 호날두가 생각나서 daviddain 2020.09.05 1965
113322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김종인) [1] 왜냐하면 2020.09.05 733
113321 잡담...(거리두기연장, 샤인머스캣) 안유미 2020.09.05 466
113320 "싸이코지만 괜찮아"의 매력은? [22] 산호초2010 2020.09.04 1228
113319 테넷에서 가장 좋았던 음악. [2] 하워드휴즈 2020.09.04 454
113318 메시 상황은 [17] daviddain 2020.09.04 788
113317 이런저런(이재명, 불법의료거부, 전교조) [4] 왜냐하면 2020.09.04 74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