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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파벨만스]가 이미지의 운동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말한다.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같은 실험적 작품이 아니라면 모든 영화는 이미지의 운동을 담고 있기에 이 표현으로 이 영화를 정의내리기는 어렵게 느껴진다. 여기서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파벨만스]는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운동하는 것을 찍었는가. 꼬마였던 샘 파벨만은 세실 비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에서 기차가 자동차에 충돌하는 장면을 보고 완전히 매혹되어 영화만들기를 시작한다. 그가 최초로 감명받았던 장면, 그가 최초로 찍기 시작한 장면은 기차의 충돌이다. 즉 이미지에 묻는다면 [파벨만스]는 무언가 충돌하는 이미지를 찍은 영화이다.

기차 장난감을 충돌시키는 영상을 찍고 난 다음에 샘 파벨만은 다른 영상들을 찍기 시작한다. 그의 스펙터클한 영상들 속에서도 뭔가가 충돌하는 장면들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충돌하는 이미지'는 단지 샘 파벨만에게 부어진 영화적 세례에 불과한 것일까. [파벨만스]는 계속해서 충돌을 그려나간다. 어린 샘이 영화 속에서 봤던 충돌은 영화와 현실의 충돌로 나아간다. 이미지의 충돌은 이미지와 현실의 충돌로 확장된다. [파벨만스]는 영화가 현실과 충돌하면서 현실의 뭔가를 날려버리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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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에는 빛이 화면 정면을 그대로 찌르는 듯이 비추는 장면이 많다. 마치 어린 샘이 봤던 영화 속 기차가 폭주하는 것처럼 빛이 화면을 향해 날아온다. 영사기 역시도 화면을 향해 다가오는 기차처럼 빛을 쏘아낸다. 그렇다면 저 영사기를 "모는" 샘은 폭주하는 영화를 어쩌지 못하고 현실에 받아버리는 기관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샘이 창조한 영화는 어떻게 현실을 받아버리는가. 가족의 캠핑 영상은 어머니 미치의 불륜을 폭로하며 다정한 부부의 일상에 부딪혀 날려버렸다. 미치와 베니 삼촌의 부적절한 장면들만 따로 잘라내고 가족에게 보여주는 저 장면은 안전한 선로를 따로 정해서 천천히 달리는 기차같다. 그러나 어머니 미치가 왜 자꾸 무시하냐면서 화를 낼 때 샘은 따로 편집한 장면들을 모아놓은 영상을 벽장 안에서 틀어준다. (이 때 벽장은 어머니 미치의 비밀을 지켜주려는 동시에 그를 도망칠 곳 없이 가둬놓는 것 같다) 그 편집모음본은 어머니 미치에게 그대로 부딪힌다.

[지상 최대의 쇼]에서 기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 기차는 기어이 자동차를 부딪혀가며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어머니 미치의 편집영상을 충돌시킨 뒤 파벨만네 가족은 어떻게 되었나. 어머니 미치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튕겨져 나간다. 파벨만 가족은 와해된다. 비록 샘이라는 개인은 어머니 미치와 화해했지만 그 충돌은 절대 회복되지 않았다. 샘이 찍은 영상은 빛으로 쏘아지며 파벨만 가족에 그대로 부딪혔다. 평화로웠던 가족은 이 파국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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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기차의 충돌을 영화와 현실의 충돌로 얼떨결에 재현하고 말았다면 졸업식 영상은 그 반대로 진행된다. 그는 로건이 자신을 괴롭힌 현실을 영상에서 죄다 편집한다. 현실에서 격한 충돌이 일어났지만 영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파국을 영화는 없는 것처럼 뒤덮을수도 있었다. 평화 속에서의 파국은 순서를 뒤집어 파국 이후의 평화로 이어진다. 로건은 영상이 상영된 이후 샘을 찾아와서 거칠게 물어보지만 그것은 이미 다른 방식의 충돌이다. (오히려 그 졸업영상은 로건의 주먹을 빌려 샘을 지키는 안전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렇게 영화가 샘의 현실과 충돌한다면, 그 이후에 따라나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이 부분에서 [파벨만스]를 두고 삶이 영화이고 영화가 곧 삶이라는 두 세계의 합일을 이 영화의 주제의식인 것처럼 표현하는 주장들이 있다. 나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벨만스]는 영화와 삶이 어떻게 괴리되는지, 그리고 샘이 어떻게 인생으로부터 혹은 가족으로부터 영화의 세계로 이동하는지를 그리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파벨만스]에서 영화는 샘의 삶을 어딘가로 계속 밀어보내는 동력이다. 삶과 영화는 합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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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의 큰 외할아버지 보리스는 샘의 영화광적 기질, 즉 예술가로서의 본능을 알아채고 삶과 영화, 혹은 가족과 영화가 분리되는 세계의 고통을 경고한다. 예술을 추구할 수록 가족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의 말은 예언처럼 적중한다. 샘의 영화가 엄마와 아버지의 이혼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가족들이 흩어져 살게 만들었으니까. 이 영화 안에서 샘은 점점 더 가족들과 멀어져간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멀어졌고 그 다음에는 베니 삼촌과 멀어진다. 샘의 영화광적 기질을 눈치챈 동생도 샘에게 질려한다. 졸업식에서는 섣부른 청혼을 했다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날을 새고 돌아온날 아침에는 어머니의 이혼 결심을 듣는다. 존 포드를 만나기 전 샘이 가족과 함께 있는 마지막 시퀀스는 샘이 아버지와 단둘이 살다가 마침내 아버지를 떠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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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는 화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화해한 이들과 함께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파벨만스]의 화해는 원망과 증오를 털어내고 보다 원만한 이별을 하는 것에 더 가깝다. 실질적으로 샘이 함께 살았던 가족들은 하나둘씩 흩어진다. 그가 최초로 가족을 찍었던 영화 속의 그 화목한 모습은 이제 없다. 그가 찍은 영상에 담긴 가족은 그의 실제 삶의 가족과 너무 달라졌다. 그의 주변에 있던 따뜻한 사람들은 이제 아버지밖에 없다. 그리고 샘은 그 아버지에게 더 이상 대학생활을 할 수 없다면서 토로한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의 삶에 실패했다는 그 고백은 영화로 투신하겠다는 고별의 선언과도 같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파벨만스]는 영화를 접했던 어떤 어린 아이가 영화를 삶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기존의 삶을 부수는 영화이다. 샘은 영화를 만나면서 영화와 점점 가까워지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점점 멀어진다.

왜 [파벨만스]는 샘이 존 포드를 만나고 나서 끝나는가. 그 바로 전의 시퀀스에서 샘이 생물학적 아버지와 헤어진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장면은 샘이 영화적 아버지를 새로 만난 것처럼 보인다. 졸업식에서 샘은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과 여자친구와도 한꺼번에 헤어졌다. 졸업식에서 돌아온 그 날 아침에는 엄마가 이혼 선언을 했다. 그가 영화로 담은 인물들과 하나둘씩 헤어지며 마침내 아버지의 소망대로 사는 것조차도 포기한다. 이제 배경은 파벨만네 가족에서 샘이 방문한 영화사로 완전히 전환된다. 이 배경의 전환은 샘이 이제 영화인으로서 삶을 시작하며 자신의 가족을 완전히 떠나는 여정의 종지부일지도 모른다. [파벨만스]는 샘의 삶과 영화가 겹쳐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터전을 영화를 만드는 곳, 헐리우드로 샘이 완전히 정착해나가는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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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유년기에 기차의 충돌 장면을 극장에서 보고 완전히 사로잡혔다. 샘은 영화만들기에 미쳐있었지만 그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동은 [파벨만스]내에서 균일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기차가 충돌하는 것을 봤던 그 감동을 최고점으로 하여 점점 더 영화에 대한 감동을 덜 받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는 가족의 영상을 보다가 충격을 받고, 졸업영상을 보면서는 자괴감을 느낀다. 영화를 본 이후의 감동이 점점 축소되는 이 흐름은 역으로 그가 조금 더 능숙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는 것과도 연결된다. 어린 샘은 기차를 충돌시키면서 영화를 찍었지만 그는 점점 더 그 충돌을 원만하게 다루며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샘이 존 포드를 만나는 장면은 훌륭한 기관사 스승과 조우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평선의 높낮이 개념은 영화의 화면이 마치 기차처럼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적절하게 통과해야하는 것처럼도 들린다. 이제 샘의 영화적 기차는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파벨만스]는 충돌을 거듭했던 기차가 헐리우드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를 그리는, 의인화된 [열차의 도착]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샘은 가족의 폐허를 떠나 마침내 헐리우드에 도착했다. 존 포드라는 훌륭한 기관사는 손가락으로 지평선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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