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자세. 토론의 목적

2011.04.30 00:26

산체 조회 수:2543

아래에 진중권 교수의 토론 자세와 관련한 글이 올라와 관련 글을 씁니다. 저는 진중권 교수의 토론 자세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백분토론이라는 상황에 있어서는 그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중 그림니르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요. 뭐 그 댓글에서 그림니르님께서 다 말씀하신 내용인데, 나름대로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토론이라고 다 같은 토론이라 보긴 어렵죠. 토론의 목적에 따라 여러 다른 방식의 토론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로 참관하거나 참여해 본 토론은 학술 토론인데요, 학술 토론의 목적은 일종의 참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장이 발의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들은 그 주장이 그르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오늘 학술 토론의 주제가 '소녀시대에서 가장 가치있는 멤버는 누구인가'라고 해 봅시다. 이 경우 저는 순규가 가장 가치있는 멤버라고 주장을 할 겁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 예를 들어 예능감이 좋고, 팀원들의 화합에 필수적이며, 입술이 3자 모양으로 생겼다 등을 주장하며 제 의견이 옳음을 보이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진중권씨는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보죠. 예를 들어 진중권씨는 노래를 잘부르고, 남성팬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그녀가 모델을 하는 비타 500이 가장 잘 팔린다는 이유로 태연이 소녀시대에서 가장 가치있는 멤버라고 주장한다고 합시다. 이러한 논의에서 진중권씨의 의견이 제 의견보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제가 제시한 근거들이, 제가 주장하려는 결론, 즉 순규가 소녀시대에서 가장 가치있는 멤버라는 의견을 뒷받침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혹은 두 번째로, 제가 제시한 근거들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진중권씨가 주장하려는 근거들이 소녀시대에서 가장 가치있는 멤버를 밝히는데 훨씬 더 효율적이다, 혹은 합리적이다라는걸 입증하면 됩니다. 학술 토론의 경우, 그 내용에서 훨씬 복잡하고 전문적인 논의와 근거들이 등장할 수 있지만 결국 저러한 방식을 통해 어떤 주장이 더 타당한지에 대한 대략적인 판정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진중권씨가 토론하는 자세라는게 이런걸 포함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겠죠. "아니 입술이 3자 모양이라는게 가치있는 멤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됩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런 말도 안되는 근거를 내놓는 산체씨의 교양수준이 의심스럽네요. 소녀시대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참 답답합니다." 학술 토론의 경우, 만약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입술이 3자 모양이라는 것이 소녀시대에서 가치있는 멤버를 가리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몇몇 근거를 들어 증명하면 됩니다. 그러면 제 논증의 타당성은 약화되고 진중권씨의 주장은 상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이후의 발언들, 그러니까 제 교양의 부족에 대한 지적이나 제 근거를 평가하는 감상등은 불필요한 부분이 됩니다. 오히려 같은 토론에 임하고 있는 저를 무시하고 면박주는 안좋은 자세를 나타내는거죠. 논증이 틀렸다고 해도,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교양 수준이나 인격을 폄하할 자격이 생기는건 아닙니다. 누구나 틀린 주장을 할 수 있어요. 특히 학술 토론의 경우, 수준높은 논의가 진행될 경우 상대방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수준낮은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 토론 자체, 그리고 그 토론에서 상대방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 자체도 수준낮은 것으로 취급될 개연성이 높아지니까요. 너는 분명 훌륭한 사람이고 너의 논의도 상당히 그럴듯해. 하지만 내 의견이 더 타당한 걸. 그러니까 내가 더 훌륭한 사람. 대충 이런게 학술 토론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세입니다. (물론 모든 수준높은 학자들의 수준높은 토론이 이런식으로 진행되는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엄청나게 저명하고 훌륭한 학자들의 경우 토론에서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토라져서 나중에는 서로 상대도 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 생각에 만약 진중권씨가 학술토론을 한다면, 예컨데 그의 전공분야인 미학이랄지 기호학이랄지 관련해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에서 질의응답을 받고 토론을 한다면, 분명 그도 제가 말한 바람직한 자세의 토론을 할거라고 확신합니다. 설령 질문자가 전혀 맥락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면박을 주거나 무시하거나 하진 않을거에요. 논문발표하다보면 제대로 이해 못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더 많거든요. 오히려 그런 질문이 들어왔을 때 친절하고 알기 쉽게 그 질문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할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진중권이 논객으로서 토론자의 자세를 보여준 무대가 주로 백분토론이라는 점입니다. 백분토론에서 중요한 점은, 소녀시대에서 가장 가치있는 멤버가 순규인지, 혹은 태연인지하는 점이 아닙니다. 그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들, 즉 시청자들에게 어떤게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지'하는 점입니다. 위에서 말한 학술토론이나 이거나 비슷해보이는데, 사실 목적이나 방식이 전혀 달라요. 극단적으로 말해 실제로 소녀시대에서 태연이 가장 가치있는 멤버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면 되는거거든요. 그렇게 보이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상대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증이 틀렸다는걸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인격이나 수준이나 이런게 부족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은 아무도 안믿었잖아요. 상대방을 양치기 소년으로 만드는거죠. 위에서처럼 상대방의 근거가 틀렸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지적을 통해 상대방이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점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하도록 하는 겁니다. 사실 보는 사람들이 주제가 되는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어떤 입장이 더 타당한지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워요. 진중권이 백분토론 무대에서 항상 상대적으로 더 그럴듯한 입장에 서있었다고 해도, 제가 위에서 말한 학술토론에서 바람직한 자세로 토론을 했다가는, 백분토론을 보는 사람들은 진중권의 입장이 더 옳은 건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어떤 절차와 근거를 통해서 상대방을 논박하고, 그 논박을 통해서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면, 그건 사람들 눈에 잘 띄거든요. 그러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거죠. '진중권 반대편 입장에 선 놈이 바보구나'

그림니르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진중권이 백분토론에서 나가면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보여주는 토론을 하러 나왔다는 점입니다. 학술토론의 경우 그 논의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 발제자나 질의자나 방청객조차,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 토론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에 대한 어느 정도 합의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분토론의 경우, 그 내용이 4대강이 되었든, 오디션 프로그램의 난립이 되었든,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대부분 해당 주제에 관한 정확하고 폭넓은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할겁니다. 이때 전문가나 권위자가 나와서 정말 그 상황에서 가장 그럴듯한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해도, 해당 주제에 관해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결론이 나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긴 어려워요. 하지만 진중권 방식으로 토론을 하면, 진중권 말이 맞는 것처럼 보여줄 수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그 교수님의 입장, 그러니까 진중권 뿐 아니라 백분토론의 토론을 교과 과정의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진중권 정도의 깜냥이 되고 완급조절이 되고 자신이 임하는 토론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가장 효과적인지 아는 사람은 토론의 목적에 맞게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교육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걸 먼저 배워버리면, 실제 자신이 필요한 토론 상황에서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대처할 가능성이 높은거 같아요. 제 생각에는, 요새 많이 알려진 예를 들자면, 마이클 센델 강의가 토론 교재로 쓰이기 훨씬 적합합니다. 논점을 명확하게 하고, 여러 사례를 살펴보고, 그 사례들이 어떠한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지 명료화하고, 혹시 학생들이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도 그 질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점을 최대한으로 뽑아내서 논의에 기여하도록 하는 방식등이 실제 토론을 할때는 더 필요하고 유용한 자세인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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