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겪은 별개의 두 이야기

2011.09.08 18:34

헤움 조회 수:2313

1. 집에서 바퀴 짓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바퀴짓이라는 게, 집안에서 바퀴처럼 불도 안 켜고 인터넷만 하면서, 밥도 거르고 면식만 하는 생활을 말하는 거죠, 잘 씻지도 않구요. 그러다가 가고 싶은 강연회에 늑장을 부려 늦게 되었을 때, 평소 10분은 걸리는 지하철역까지 달음박질을 해서 막 출발하려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보통 밥 안 먹고 그렇게 뛰면, 평소보다는 힘들어도 곧 회복되었는데 그날은 도통 회복이 안 되더라구요. 심장이 심하게 쿵쾅쿵쾅 거리면서, 식은 땀도 많이 나고, 주변 소리도 점점 잦아들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지하철 문 앞쪽에서 앉아버렸어요. 그러다가 정신을 몇 십 초 잃었어요. 정신을 차리니 제가 아예 지하철 문 앞에 앉아 있더라구요. 그때부터 서서히 회복되지만, 평소 건강하다는 평가를 받아온지라 정신적 충격도 꽤 크더라구요. 이 일이 한 십 분 정도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럴 동안 주변에서 저를 염려해주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아마도 저를 술 취해서 쓰러진 사람 정도로 여겼나봐요. 아, 내가 지하철에서 쓰러지는 사람을 보면, 주의깊게 살펴야겠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거기에 어떤 엄마가 아이가 엘리베이터에 끼게 되는 상황인데, 주위에서 멀뚱거리면서 쳐다보고만 있었다는 얘기 들으면서도, 제 자신도 위기 상황에 "내가 하자"라는 생각을 맘에 품게 되었습니다.



2. 제 친구가 엊그제 겪은 일입니다. 

이 친구랑 저랑 8월에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크로스월드를 관람했어요. 국립극장 측에서 케냐, 우크라이나, 인도네시아, 버마 등에서 전통 악기 뮤지션들을 초청해서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크로스월드는 그 뮤지션들이 각국의 전통 악기로 공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케냐는 북 하나로 관중들을 흥겹게 했고, 동남아시아 어떤 나라 악기는 코로 부는 피리라서 놀랐습니다.

특히 몽골이 인상깊었는데, 마치 목에 스트레스를 줘서 득음을 하는 판소리처럼, '우에우에'하면서 목으로만 내는 소리가 굉장히 독특하더라구요.


공연의 컨셉 자체는 진부하기는 하지만, 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엊그제 제 친구가 밤에 귀가하는 와중에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아저씨가 진상이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자기자식에게 전화로 사랑고백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 외국인들 한 무리가 타서 진상아저씨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진상아저씨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고 말을 걸기 시작하더니, 사과를 꺼내서 '사과'라고 말해보라고 하고, 그 사과를 주며 자기의 관대함을 뽐냈죠. 거기에 명함도 꺼내면서 자기한테 연락하라며 허세를 부렸죠.

눈치채셨겠지만 이 외국인들이 국립극장 크로스월드를 공연했던 뮤지션들이었습니다.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들은 각국에서 음대 교수 혹은 강사들이죠. 피부색이 평균적인 한국인보다는 어둡다는 것 정도. 이들은 한국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을 잘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좋게좋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더라구요. 진상아저씨에게 계속 응해주었던 거죠.

그러다 논현역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하철 직원(공익요원) 둘이 들어와서 이 뮤지션들에게 소란피지 말라고, 떠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뮤지션들도 대응하기보다는 오케이 오케이 하였고, 다른 직원이 그만 하자는 제스쳐를 취해서 그쯤에서 그냥 물러났습니다. 이 모든 게 논현역에서 지하철이 정차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죠. 뮤지션들을 인솔하는 한국인 가이드가 있었는데, 이 일이 있기 전에 내렸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파악도 하기 전에, 내릴 곳이 되어서 내렸는데, 너무 화가 나서 지하철에 항의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알려주더라구요. "외국인이 떠든다고 다산120에 신고가 들어와 출동한 거에요"라고 말이죠.

떠든 건 진상아저씨였고, 전체 목소리도 지하철에 한 무리가 들어와서 얘기하는 정도였습니다. 그게, 하필, 누군가에는, 이 외국인들이 떠든 것처럼 보였나봐요. 지하철 직원도 신고를 받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훈계를 하고 내렸구요.


인종차별 쪄는 이 상황에, 그리고 급 어두워지는 뮤지션들 얼굴을 보고, 그리고 자기가 그 상황에 재빨리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화나고 부끄러워 미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건 이전에 아저씨가 한국어 어쩌고 할 때부터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쿠바의 연인'의 오르엘비스가 지하철에서 사탄 소리 들었다는 상황을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될 줄이야.

마주칠지도 모르는 비슷한 상황에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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