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가 생각하는 좋은 비평가

2012.09.22 16:12

toast 조회 수:1947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이란 책 중 '문학과 비평이라는 주제에 대한 메모'(1930년 칼럼)에서 발췌.. - 

 

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비평가를 반기게 마련이다. 이는 그에게서 뭔가 자기 예술에 보탬이 될 만한 걸 배울까 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해서 배워지는 일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행위가 이해받지 못한 채(과대평가되건 과소평가되건 간에) 무감각의 비현실 속을 부유하는 대신, 자신과 자기의 작업을 자기 나라와 문화의 전반적인 평가 속에서, 또 재능과 성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공부요 수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략...)

 

천부적인 진정한 비평가라도 어떤 실수나 무례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보다 훨씬 예의 바르고 양심적이되 창조적인 면이 결여된 다른 누구의 비평보다 그의 비평이 항상 더 적확하다. 진정한 비평가에게는 언어의 수준과 진정성에 대한 감각이 늘 있지만, 평범한 비평가는 원본과 모조품을 쉽게 혼동하고 때로는 속임수에 말려든다. 진정한 비평가를 식별하는 두 가지 중요한 표지가 있다

 

첫째, 진정한 비평가는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와 허물없이 친숙하여 오용하는 법이 없으니 살아 있는 좋은 글을 쓴다

 

둘째, 자신의 주관성과 개인적인 기질을 절대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 노력이 있기 때문에, 독자가 비평가의 주관적인 척도나 기호를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잣대처럼 활용할 수만 있다면, 비평가의 반응을 통해 객관적 가치를 쉽게 읽어내게 된다.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훌륭한 비평가는 개성이 강하고 그것을 스스로 똑똑히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는 자기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어떤 렌즈를 투과하여 들어오는 광선인지를 인지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천재적인 비평가가 어떤 천재 작가를 일평생 거부하고 야유하고 공격하는 그럴 때조차 우리는 그가 작가에게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그 작가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심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빈약한 비평가의 중대한 결함은, 개성이 거의 없거나 그것을 표현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비평이 아무리 격렬한 칭찬이나 비난을 담고 있다 한들, 정작 본인도 제대로 못 봐 제대로 묘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떠들어댄다면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뭘 알게 되겠으며, 그런 비평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로 그런 무능한 비평가들이 종종 객관성을 빙자하여 미학이 마치 정밀과학이라도 되는 양 구는데, 실상은 자신의 개인적인 직관을 믿지 못하니까 무난하게 균형과 중립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비평가에게 중립이란 거의 언제나 미심쩍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결함, 즉 정신적 체험에서 열정의 결핍을 뜻한다. 비평가에게 열정이 있다면 그것을 숨길 게 아니라 드러내야 마땅하다. 자기가 무슨 측량기사인 양 문화부장관인 양 굴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개인으로 서야 한다. 

 

보통의 비평가와 보통의 작가의 관계는 대략 상호간에 애매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비평가는 작가를 별로 대단찮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이 인간이 나중에 천재로 판명이 나면 어쩌나 두려워한다. 그리고 작가는 비평가가 자신을 이해하지도, 자신의 가치나 결점을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느끼지만, 최소한 알아보고 박살을 내는 그런 사람과 마주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쨌거나 비평가와 그럭저럭 잘 지내면서 덕 보기를 바란다. 평균적으로 독일에서 책 쓰는 사람들과 비평가 간에는 바로 이런 지지리 좀스러운 관계가 지배적이고,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 언론이나 부르주아 언론이나 대동소이하다. 

 

(...중략...)

참다운 비평가를 만난다면, 설사 그가 공공연히 싸움을 걸어올지라도 일종의 동료의식 같은 걸 느끼게 된다. 

 

 

---------------------------------------------------------------------------------------------

헤세는 문학평론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영화평론가로 생각했을 때 글 읽다보면 역시나 정성일이 떠오릅니다 ^^

시각에 동의 안해도 평론글 읽을 가치가 있는 거의 유일한 평론가죠.

사기인지 진품인지에 대한 감식안도 대단하고요 ㅎ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37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93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070
126530 Love is an open door 폴란드어, 슬로바키아어 new catgotmy 2024.06.22 1
126529 인터넷 글의 특징, 3줄 요약 [2] new catgotmy 2024.06.22 33
126528 초원의 집 한국 첫 번역 new 김전일 2024.06.22 59
126527 [넷플릭스바낭] 재밌지만 난감한 대만산 범죄 스릴러 '돼지와 뱀과 비둘기' 잡담입니다 [2] update 로이배티 2024.06.22 133
126526 곰이 추는 강남스타일 daviddain 2024.06.21 94
126525 프레임드 #833 [2] Lunagazer 2024.06.21 38
126524 프로야구 순위 보니 신기하네요/코파 아메리카 [7] daviddain 2024.06.21 132
126523 일상 잡담. [8] update thoma 2024.06.21 135
126522 Love is an open door 네덜란드어 [1] catgotmy 2024.06.21 58
126521 Donald Sutherland 1935 - 2024 R.I.P. [11] update 조성용 2024.06.21 262
126520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빔프로젝터와 스크린, 사운드바에 이어 UHD 블루레이플레이어까지 질렀네요. [1] update ND 2024.06.21 142
126519 [웨이브바낭] 루마니아산 시골 범죄극, '몰도바의 해결사' 잡담입니다 [4] update 로이배티 2024.06.21 149
126518 프레임드 #832 [4] Lunagazer 2024.06.20 48
126517 노빠꾸 논란 catgotmy 2024.06.20 239
126516 Kendrick Lamar - Not Like Us (Live @ The Pop Out: Ken & Friends) daviddain 2024.06.20 58
126515 Love is an open door 스웨덴어 catgotmy 2024.06.20 51
126514 H1-KEY 신곡 뜨거워지자 MV [4] 상수 2024.06.20 117
126513 듀게의 사춘기 자녀 부모님들에게 -인사이드아웃 2 관람 강추(스포) [2] 애니하우 2024.06.20 219
126512 듀게 오픈채팅방 멤버 모집 물휴지 2024.06.20 36
126511 혹시 지금 날씨가 유럽 같나요? [2] 수영 2024.06.19 35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