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가 갑자기 컴퓨터가 멈춰서 글이 날아갔습니다- 이 컴퓨터가 할아버지이다보니 영 연로하시네요. 아아 허무해---...

급하게 다시 쓰느라 좀 문장이 날아갑니다.

 


율곡 이이하면 우리에게도 굉장히 잘 알려진 유학자입니다.
10만 양병설이라던가 경장이라던가 태교 교육의 중요성이라던가(?) 모자가 함께 한국 화폐계를 정복했다던가... 개인적으로는 결코 현실 앞에서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개혁자로 기억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조선 과거사의 전설입니다. 9번 장원한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요? 정약용도 네 다섯 번 정도 장원을 먹긴 했지만, 또 율곡의 동생도 못지 않은 천재였지만 역시 그와 비교하면 빛은 바래지요.

이처럼 역사상 보기 드문 천재였지만, 그의 학창생활 - 그리고 직장생활은 참 암울했습니다. 

 

그가 처음 장원을 한 것은 13세 때로, 소과 진사 초시에 합격했습니다.

남들은 환갑 다 되도록 붙을까 말까 하는 시험이었는데 이런 어린나이에 장원을 했으니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그런데 이후로 순탄하게 풀린 것 만은 아닙니다.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십니다. 아버지는 오래지 않아 첩을 들였는데- 전처와는 전혀 다른, 술집의 포악한 여자였지요. 한참 사춘기 겪을 무렵에 충격이 심했던지, 괴로워하던 율곡은 가출을 해서 금강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의 일로 율곡은 살아 생전은 물론이거니와 죽은 이후로도 무자비하게 까입니다.
이유인 즉슨 그가 출가를 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라는 의혹 때문인데요. 지금이야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머리를 깎건 볶건 아무 상관 없습니다만.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단의 종교에 몸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매장을 당할 사안이었습니다.
(정작 성리학의 원조인 주자가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채식주의자로 욕 먹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잊고 있습니다) 율곡 옹호파는 머리 자른 적 없다라고 설을 풀고 비난파는 반대로 이야길 해서 치열하게 치고 받았습니다만...

 

어쨋건. 그렇게 절에서 지내던 율곡은 불교에서도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산에서 내려와 과거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21세 때 한성시에서 장원 한 번 하고, 23세 때 별시에서 덥석 장원을 합니다. 이 때 그가 제출했던 답안지가 천도책(天道策)입니다. 이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쯤 되는 답안으로, 지금까지도 읽어볼 만한 명문장입니다.

 

율곡 이이가 조선의 대학이었던 성균관에 입학한 것은 이 즈음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결코 순탄하게 다니지는 못했습니다. 벌써 출가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에 파다하게 퍼져 주변 학우들이 따돌리는 것은 물론, 심지어 학생회가 나서서 괴롭힐 정도였지요.
게다가 성균관의 학생회는 지금 학생회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나 임금을 비판하는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처벌하거나, 심지어 학교에서 쫓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결정에는 임금이나 대사성(교장선생님)도 관여할 수 없었지요.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성균관의 학생회장을 장의라고 했는데, 보통 집안 좋고 빵빵한 자제가 맡았지요. 율곡 이이가 다닐 즈음의 장의는 민복(閔福)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학생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꼭 치러야 할 의식이 있었습니다. 대성전에 가서 공자의 위패에 인사를 드리고, 먼저 성균관에 있는 선배들을 만나 자기소개를 하는 거지요. 이걸 대충 상읍례라고 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게, 이걸 해야지만 식당에서 밥이 나왔습니다.
밥을 못 먹으면 배가 고프기도 하거니와... 출석 체크도 못합니다.
성균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소리지요.
그런데 민복은 학생회 사람들을 동원해서 대성전 앞을 막아서고 율곡을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이유인 즉슨 사문 - 이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사실상 중 - 이 어떻게 감히 성전에 들어올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 때 온갖 상스러운 욕설이 퍼부어졌으리라는 데 천 원 걸겠습니다.
결국 해가 지도록 율곡은 대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느라 안색이 파랗게 변했지만 당사자는 태연했다더군요.

 

어떻게 어떻게 성균관에서 쫓겨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만... 이후로도 학교생활은 힘들었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율곡이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동안 묘소를 지켜야 했죠. 그래서 한동안 공부를 접어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상이 끝나는 명종 19년(1564) 이 해 율곡의 나이 29세.
이 해 그의 포텐셜 폭발 -_-
율곡은 생원 초시, 생원 복시, 진사 초시, 대과 초시, 대과 복시, 대과 전시의 6개의 시험에서 모조리 장원을 먹습니다. 이게 전부 한 해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과거 제도는 대단히 복잡합니다만. 정규시험은 본디 식년시라고 해서 3년에 한 번 봅니다. 그 외의 시험들 증광시나 알성시는 특별시험이었지요. 게다가 식년시는 성균관을 다니면서 출석 점수를 채워야만 볼 수 있는 시험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특차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물론 율곡 이이도 완벽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해 있었던 진사 복시에서는 고작(!) 3등 12위 밖에 못했거든요. 근데 이렇게 되면 채점한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싶지, 율곡 이이가 시험 잘 못 보았겠거니 하는 생각은 않게 됩니다.


자, 그럼 이제 율곡 이이를 괴롭혔던 학생회장의 성적을 볼까요?

민복은 당연히 율곡보다 먼저 성균관에 입학했습니다. 명종 4년(1549) 진사시에서 3등 13위로 합격했거든요. 장의도 하고 여흥민씨인 걸로 보면 명문가겠지요. 엄청 가난했던 율곡 이이네와 어찌 비교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과거는 대과를 붙어야 진짜입니다. 생원시, 진사시는 소과라고 하는데 기초시험이지 정말 중요한 건 대과거든요. 민복은 대과에 붙기는 했습니다. 다만 율곡 이이가 전설 오브 레전드가 된 이후 약 4년 뒤인 선조 1년(1568)의 일로 성적은 병과 22등이었습니다.
과거는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해서 총 33명을 뽑습니다. 결국 맨 끝에서 두 번째로 붙었다는 소리입니다. 아, 물론 과거 자체가 붙기 대단히 힘든 시험인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율곡과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만... 어쨋거나 율곡을 왕따 시킨 덕분에 역사에 이름이 남았지, 안 그랬으면 이런 사람 있는 줄이나 알았겠습니까.

 

결국 출세한(?) 이이는 죽어서 그의 위패가 대성전에 모셔지기까지 했으니 웃을 수 없는 희극이었습니다.


P.S : 웕. 글 날아가니 허무하군요.
이번 달에 나오는 신간이 잘 팔리면 작은 넷북이라도 하나 사야겠습니다. 잘 팔리길 빌어주세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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