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님 바낭] 함께 살기

2012.10.23 16:53

fysas 조회 수:3045

듀게에는 저의 동거견 반지의 사진도 자주 올리고 하도 내 새끼 예쁘다고 자랑질을 많이 해서

개님 이야기는 좀 텀을 두고 써야겠다... 라는 생각을 지난 번 글을 올리고나서 했었습니다.....;

그런데 또 아랫글에 댓글을 쓰다보니까 문득 하고 싶은 말들이 많네요.

 

 

반지랑 저는 1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제가 반지를 키웠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건,

물론 양육은 제 몫이었지만 함께 사는 시간동안 반지도 저를 정말 많이 성장시켜줬기 때문이죠.

사실은 반지가 제게 오기 전에, 먼저 저를 거쳐간 녀석이 있어요.

한달 만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난 페키니즈 육감이라는 녀석인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데려와서 오자마자 아픈 애를 붙잡고 한달 내내 쩔쩔 매기만 하다가

결국 보내고선 정말 생명을 거두는 게 이렇게 무거운 일이구나.. 절실히 깨달았었죠.

그래서 다신 아무 동물도 키우지 않을테다! 선언을 했는데.................

아빠가 상심한 저를 위해 친구분께 제 의사도 묻지 않고(..) 얻어온 녀석이 바로 반지였죠.

 

아직도 첫만남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날짜는 2002년 8월 30일이었어요.

새벽 6시에 전화로 강아지 데려왔다고 깨우시는 아빠의 목소리에 잠이 덜 깨서 터덜터덜 집밖으로

나갔더니, 난생 처음 타보는 차의 진동(더군다나 당시 아부지는 회사 용달차를 몰고 계심;)에 겁먹고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주먹만한 강아지가 제게로 폴짝~ 날아오듯 안겼어요.

그렇게 저를 주인으로 콕 찍은듯 안겨오는 반지의 체온을 처음 느꼈던 순간, 자다 깨 나온 상태라

머리는 산발이고 잠옷에 겉옷 하나 걸친 상태로 길에 서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그렇게 반지와 한 식구가 된 당시의 저는 정말 애완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개를 키운 적은 많았지만 끝까지 키웠던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개 키우는 법, 훈련시키는 법 따위의 책을 사고 필요도 없는 애견용품만 잔뜩 샀죠.

육감이는 뭣 모르고 데려와서 아프다가 보냈으니 반지만큼은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의지였죠.

책들은 물론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특히 목욕시키는 법) 애견용품들은............;

그렇지만 반지는 기특하게도 처음 집안으로 들어와서 알아서 제 옆자리를 자기 잠자리로 찜하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패드 위에 알아서 화장실을 가렸죠.

오오오~ 얘 천재견인가봐!!!! 했지만 반지의 영특함은 거기까지......^^;

어릴 때의 반지는 태어난 환경 탓인지 주인이고 뭐고 사람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천방지축, 개구쟁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라 주인이 좀 오라고 해도 오지도 않고, 그러다가 저 놀고 싶으면 쫓아와서

놀아달라고 땡깡땡깡땡깡, 예뻐서 좀 만져주려고 하면 몸을 이리저리 틀다가 도망가기 일수...

그렇게 개 길들일 줄 모르는 주인과, 사람 의식 안 하는 개님의 동거가 시작됐어요.

 

반지는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혼자 전후좌우 안 가리고 뛰어다니다가 주인 다리에 끈 꼬이기 전문,

잠시 끈 풀어놓으면 차도고 물이고 안 가리고 전력질주해서 사고날 뻔한 순간도 여러 번,

사람을 좋아해서 아무나 오면 무릎 위에 폴짝폴짝 잘도 올라가 무릎을 차지하고,

그렇지만 정작 예쁘다고 만져주고 예뻐해주는 건 질색하던 까칠하던 녀석이었어요.

 

그렇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반지는 산책을 나가면 제 발걸음에 맞춰서 저와 나란히 걷구요.

가끔씩 지가 뛰고 싶으면 저를 올려다보면서 뛰고 싶다는 눈빛을 보낼 줄도 알아요.

끈을 풀어놔도 지 혼자 총총총 가다가 제가 안 보이면 다시 돌아와서 빨리 가자고 저를 재촉하구요.

여전히 사람을 좋아해서 집에 오는 손님들을 반기지만 그들의 무릎에 편하게 올라가진 않아요.

예전과 다르게 세상 누구보다 주인인 저를 의지하고 저만 바라보는 반지를 보고 있자면

참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고마운 한편으론, 조금 미안하기도 합니다.

세상 두려운 줄 모르던 자유로운 강아지가 못난 주인 만나서 겁많은 할매가 됐구나.. 싶어서요.

 

이제 반지 얼굴을 지긋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들여다보입니다.

이렇게 반지와 제가 10년이란 시간 동안 천천히 가까워지고 익숙해지고 소중해졌으니,

앞으로의 시간들도 더욱 서로 가까워지고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겠죠.

그런데 그 시간을 생각하면 흐뭇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마음이 찌릿찌릿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애틋하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해도, 결국 언젠가는 제가 먼저 이 녀석을 보낼테니까요.

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날 것 같네요. 미리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냥, 지금 함께 하는 순간에 잘해주고 많이 사랑해주는 게 최선이겠죠.

 

 

 

 

이런 긴 바낭글에 사진이 없으면 반칙이니까..............

 

 

 

 

 

 

그리고 요즘 굉장히 재밌다고 생각하는, 차를 탔을 때의 개님......

반지는 차만 타면 운전석에 있는 사람의 무릎에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어요.

그렇다고 운전석에 얌전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조수석에도 사람이 있으면 왔다갔다.....

10년 동안 고치지 못하던 버릇이었는데, 그 버릇이 최근 몇 달만에 완전히 고쳐졌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탔기 때문에 아빠가 귀엽다고 내버려두신 탓이 컸는데;;

최근에 제가 운전을 하면서, 아빠만큼 운전이 능숙하지 않은 제 운전 중에 반지가 무릎으로

뛰어들면 사고가 발생할지도 몰라서 반지를 조수석에 매두고 출발하곤 했었거든요.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까 이제 반지도 운전석은 가면 안되는 곳이란 사실을 알았어요.

운전하는 제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한참 시무룩하면서도, 제가 좀 눈길이라도 주지 않을까

만짐만짐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애처롭게 쳐다보면서도, 절대 운전석으로 오진 않아요.

이런 거 보면 정말 10살이라는 나이가 헛먹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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