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이 마음이 안 좋다

2012.12.21 21:29

조회 수:1667

시골에 살다 보니(삼 년째) 투표하기가 도시 살 때처럼 여의치 않습니다.

살던 지역,  지난 주까지 폭설 여파에 대중교통 이용이 힘들었고 만일 눈 내리면 투표장에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자가용 모는 이들조차 눈만 내리면 잠잠해지는 마당에 공영버스 운행을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다행스럽게 기온은 뚝 떨어져도 눈은 내리지 않아 무탈하게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진눈깨비는 내렸지만 쌓일 정도는 아니어서)

아직 눈이 녹지 않아 걷기 쉽지 않은 길을 종종걸음하시던 어머니, 가뿐 숨으로 이렇게 내뱉으시더군요.

" 너희 아니면 이렇게 투표하러 가지 않는다"

조금 덧붙이면 어머니는 일흔여섯이시고 이번 투표에 미리 암울한 전망을 하셨더랬습니다.

당신 젊을셨을 때부터 한 번도 변한 적 없던 세상이었다고.

물론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이제껏 투표는 꾸준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건이 그렇고 또 몸도 안 좋으시다 보니 이번  투표를 안 하시겠다더군요.

눈이 내리면 젊은(?) 우리조차 투표장에 몇 시간이고 걸어가야 할지도 몰라 그런 어머니 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 분이 힘든 걸음을 하시며 나지막히 저렇게 말씀하실 때 '진짜 우리 절박하구나!' 새삼 울컥했습니다.

그날 밤 무릎 꿇고 기다리다(진짜 티비 앞에서 그러고 있었습니다) 발표된 출구조사  또 시간을 더해도 달라지지 않는

개표 상황에, 가족 모두 열 시도 안 되어 모든 불 꺼버리고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누웠다고 잠 드는 상황이 아니지만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불 끄면 사방이 껌껌한데 마음까지 암흑인 2012년 12월 19일의 밤이었습니다.

(동네와 떨어져 있는데다 전등 단 전봇대도 주변에 없고, 저의 집 불 끄면 주변이 칠흑입니다)

다음 날, 밥을 먹어도 무엇을 해도 집안 공기는 평상시와 달랐습니다.

부러 밝은 목소리로 흰소리 해도 무겁게 흘러가는 공기의 흐름을 바꿀 순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 어머니 한 말씀 꺼내시더군요.

"늙은이 마음이 안 좋다"

열 자도 안 되지만 짧은 그 탄식 같은 말씀에 당신 마음을 헤아리고 또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젊은 층보다 배나 늘어난 오륙십대 투표인 수의 압도적 지지, 당신 연세에선 몰표에 가까운 결과에 저렇게밖에 심사를

나타내실 수밖에 없는 게 서글펐습니다.

 

투표가 대단한 무엇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균열의 방편은 될 수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당하면 우리도 다르게 답할 수 있고, 그래서 너희도 달라져야 한다는 답이 될 수 있다고.

많은 분들처럼 저도 이번엔 정말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정말 희망이 될 수 있는 세상인걸까 싶을 뿐.

많은 분석과 또 전망 그리고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겠죠.

지나가고 또 살아야 하니까.

 

+ 듀게는 눈팅만 하는 곳이었는데 이번 대선 후유증 제게도 참 커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넋두리 아닌 걸 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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