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8 05:02
한때 파리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어요.
한국을 떠났을 때와는 달리, 가세가 막 기울기 시작한 시기한 탓에 몇몇 친구들처럼 좋은 지역에 방을 구하진 못했어요.
그래서 파리에서도 가장 끄트머리 동네에 아파트를 구했답니다.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마치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처럼 외곽이
되어버리는, 그런 교차 지점에요. 그나마 파리 시 내부라는 건 행운이었죠. 밤이 되면 마구 무서워지는 RER를 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집안 사정 때문에 멀리나와 있어도 마음이 스산했던 나는, 점점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기 시작했어요. 학교에 가서도 필요한 말 이외엔
별로 하지 않았는데, 그냥 수줍고 재미없는 동양애인가보다, 하고 넘어갔을 거예요.
수업이 끝나면 매번, 파리에서는 드물게 밤 12시까지 여는 마트에 가서 문을 닫을 때까지 생필품 따위를 구경하는 게 낙이었어요.
그리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곤 했죠. 한국인 마트와 식당 들이 그 마트 근처에 있었어요.
기억하고 있는 그날도 12시가 다 된 시간, 토막내서 포장된 생선 조각과 동그란 쌀, 체리 등을 계산하고 나오던 참이었어요.
장바구니를 확인하고 있는데, 내 물건이 아닌 바게트 빵이 봉투에 들어있더군요. 내 뒤에 서있던 체구가 작고 마른 동양 남자애의 거구나, 감이 왔죠.
나는 뒤따라 나오는 그에게 프랑스 말로, 이거 당신거죠? 라고 물었는데 그 아이는 영어로 대답했어요.
쏘리. 아이 캔 낫 스피크 프렌치.
아! 감이 온 나는 물었어요. 한국 사람이세요?
하니까 네. 그쪽도 한국 사람이시구나. 하고 웃더군요. 무척 환하게.
-이 바게트 사셨죠? 이거 만져보니까 벌써 딱딱해졌는데. 그냥은 못먹어요.
-아 그래요? 밤에 숙소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반 갈라서 버터 바른 다음에 오븐에 구우면 괜찮아요.
-여행왔거든요. 오븐 같은 게 있을라나 모르겠는데 가질래요?
-이미 제가 돈 냈는데요.
이렇게 대답하고 나는 갑자기 막 웃어버렸어요.
그냥 마구 웃겼어요.
오랫만에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상황이 나를 흥분시켰나봐요. 머리에서 번역하지 않고 바로 말해도 되는 모국어.
자연스레 마트에서 나와 함께 밤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 아인 외곽에 숙소를 정했더군요. RER를 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가끔 심야엔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택시를 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관뒀어요. 배낭여행객이 지불하기엔 외곽까지 택시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불어도
못하고 지리에 어두운 외국인이 그 시간에 외곽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요. 게다가
그 당시에는 후대폰로밍이란게 드물 때였고, 전화기가 없으니까,그래서 잘 들어갔나 확인할 방법도 없는데.
사실 그 모든 건 핑계일지도 몰라요. 그냥 숨을 쉬고 있는 존재와 더 같이 있고 싶었을지도.
그가 길 고양이라거나, 거리를 방황하는 강아지였어도 나는 더 같이 있고 싶었을거예요. 그 밤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집에 가요.라고 말해버렸어요.
가서 영화 한편 봐요. 그리고 첫차가 다니면 그때 돌아가요. 우리 집에서 조금만 더 가면, 그쪽 숙소인 것 같으니까.
그 아이는 정말 그래도 되냐고 되묻더군요.
그래서 대답했어요. 네. 집에가서 오븐에 바게트에 버터를 발라서 데워먹어요. 뭐. 실은 그건 아침식사긴 하지만.
집에 도착하고 무슨 영화를 볼래요 하고 물었는데, 언뜻 그 아이 목덜미에 문신을 발견했어요. 알렉스라는 글자였어요.
혹시 나쁜 피의 알렉스냐고 물으니, 맞대요. 그래서 레오까락스를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건 너무 우울해지니까 다른 게 좋겠다며,
지상의 밤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이런, 짐 자무쉬...
나는 기분이 이상했어요. 오래 전 나와 헤어진 어떤 남자는 뒤늦게 외롭고 심심하지 않냐며 프랑스까지 택배를 보내왔고, 그 안에는 짐자무쉬의 영화 씨디가 잔뜩 들어있었거든요.
지상의 밤 역시. 나는 그걸 풀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끝까지 재수가 없었어요 그 인간은. 왜 니가 나한테.
-좋죠. 짐자무쉬. 정말 좋아해요. 정말 너무.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 짐자무쉬의 영화를 낯선 아이와 함께 봤어요. 버터바른 바게트를 오븐에 구워 팝콘 대신 삼아.
영화는 무척 아름다웠어요. 몇 군데의 도시가 나오는 옴니버스 형식이었는데, 파리도 그 중 하나였지만, 사실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았어요.
중간 중간 약간 졸았던 것도 같은데, 가장 마지막 장면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나요.
어느 술취한 남자가 쓰러져 있다 술이 꺠어 눈을 떠보니, 하얀 눈밭의 아침인 그 장면.
그 눈부신 눈밭이 끝이 나자, 옆을 보니 낯선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어요. 나는 그애에게 나의 유일한 카우치 겸 베드를 내어주고
한국에서 보물단지 끌고오듯 가져온 전기장판을 켜고 그 위에서 잠을 청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먼저 일어난 그 애는 우리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고 있더군요. 나를 본 아이가 말했어요.
-저기, 이리로 와봐요. 눈이 엄청왔네요.
거짓말처럼, 지상의 밤을 보낸 아침, 제일 꼭대기 층이었던 우리 집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온통 하얗더군요.
파리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온 걸 본 건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 지는 잘 기억이 안나요. 어쨌든 그 날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함께 마시고 헤어진 후,
다음 날 미술관에서 만나 같이 구경을 했던 건 확실해요.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가세가 더 기울었고,
나는 학교를 끝마치지 못한 채 한국으로 영영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애와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죠.
한국에 돌아온 후 만난 그 애의 팔목에는 '지상의 밤'이라는 문신이 추가되었어요.
두 번 정도는 술 김에 포옹을 한 적이 있고, 술이 깨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영화 이야길 하곤 했죠.
하지만 그 날 이후로는 같이 밤을 지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늦은 새벽이라도, 늘 헤어지는 쪽을 선택했죠.
그건 글쎄요. 무언가를 잃기 싫은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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