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방황, 허무, 성장 같은 것들에 매료되는 한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서적으로 예민했던 그 시절과 그때 보고 듣고 읽었던 것들은 깊은 각인으로 새겨져, 살다가 어느 날이든 문득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게 가끔 생각나는 아리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영화 <레스트리스(Restless, 원제 Levottomat)>의 주인공입니다

동명의 다른 영화가 더 알려진 듯한데, 2000년도 핀란드 영화인 <레스트리스>는 당시의 세기말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자국에서 흥행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하네요.



LEX037D.jpg?1


P8dWZRs.jpg?1


어쩐지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는 아리. 영화는 그의 독백으로 시작됩니다.

 

의대생 초년에 나는 내 꿈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여러 명의 아이들, 바닷가의 집, 세계평화, 가족, 의미 있는 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 사랑하는 여자, 행복해진다는 것...

그 목록을 작성하고서 여러 해의 시간이 흘렀다.

어떤 꿈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떤 것은 신경도 안 쓰지만...

내 인생은 공허하다.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MaOtqdU.jpg?1


늘 죽음과 삶의 긴급한 경계를 목도하는 앰뷸런스 의사는, 어쩌면 아리라는 인물에게는 필연적인 직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으로는 죽음을 앞둔 채 병원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매일 밤 다른 여자와 섹스하고 다니지만 누구에게도 상처 주기 싫어서누구도 사귀지 않습니다.




0BltC6O.jpg?1


그런 아리에게 어느 날 한 여자, 티나가 나타납니다

밝은 성격으로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다가오는 티나에 엉거주춤 이끌려, 아리는 그녀와 그 친구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w8sabEW.jpg?1

zOfUPOK.jpg?1


그들만의 의식으로 시작하는 한여름의 휴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 무리 청춘들의 빛나는 한 때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긍정이든 부정이든 옳고 그름이든, 어떤 가치판단도 유예한 채 지금을 살아갈 뿐인 아리는, 여자친구의 친구와도 개의치 않고 섹스 합니다

아리 입장에서 정확히는 다가오는 여자를 거부하지 않았을 뿐이죠. 어쩌면 티나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xLVIKgy.jpg?1


이런 아리에게 목회자인 한나 리카와의 만남 또한 필연적이었을지 모릅니다

티나의 친구들 중 한 명인 한나 리카는 아리의 미심쩍음을 눈치 채고, 그에게 정면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인생에 있어서 선이나 진실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과연 한나 리카는 옳은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목회자도 한낱 인간일 뿐..


 


4WscxLh.jpg?1


아리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동시에 새 생명은 잉태됩니다.


그리고 아리의 독백과 함께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혼자이다. 단지 함께 혼자인 것이 좀 더 나을 뿐이다



최근 뉴스를 통해 어떤 이들의 죽음을 접하며 생각했습니다. 우환에 살며 안락에 죽는다고 맹자는 말했다는데,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실패 없이 도달한 이에게는 노래를 불러 주어야 할까.

하지만 선택했든 아니든, 대부분은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괴로움은 유전자의 명령일까, 의식의 그것일까.

 

사유적인 언어로 포장하지만 실은 인간이란 단순하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방아쇠는 작은 치통이나 10mg의 호르몬일 수도 있고, 잠자리에서 등을 맞댄 고양이 한 마리의 온기가 다시 사람을 살게 하는 구원이 될 때도 있습니다. 얼마간의 의식주가 해결되면, 대부분은 행복하게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신이 아직 죽지 않아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탁통치 해주던 시절이, 실은 인간들에게는 태평성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은 이제는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아리도 이제는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잘 지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합니다.








5jxSjWS.jpg?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7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2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460
109190 이 행성을 아는 분은 없을 것 같지만 [6] 어디로갈까 2019.07.21 1055
109189 올해 개봉작 1위 예약! <기생충>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알리체 로르와커의 <행복한 라짜로> 초강추합니다! [6] crumley 2019.07.21 1317
109188 청년버핏 징역형 선고 메피스토 2019.07.21 748
» 핀란드 영화 <레스트리스>- 죽음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 [3] 보들이 2019.07.21 1301
109186 Tv에 나만 보이는 영화 가끔영화 2019.07.21 410
109185 인어공주보다 흑기사가 더 흥미로운 이유(Feat 한일 경제전쟁) [3] Isolde 2019.07.20 840
109184 [EBS1 영화] 디스트릭트9, 사랑의 기적 [8] underground 2019.07.20 785
109183 롱샷을 보고.. 라인하르트012 2019.07.20 645
109182 스포일러] The Aftermath 겨자 2019.07.20 589
109181 그와 함께한 저녁식사 [11] 어디로갈까 2019.07.20 1521
109180 프엑 막방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잡담... [1] 안유미 2019.07.19 749
109179 탑건: 매버릭 예고편 [7] 으랏차 2019.07.19 1067
109178 노노재팬과 감동란 [13] eltee 2019.07.19 2095
109177 오늘의 일본 만화잡지(3)(스압)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7.19 424
109176 이런저런 일기...(생명력, 신비감) [2] 안유미 2019.07.19 656
109175 소공녀- 경제적 압박이 심할때 무엇을 정리할 것인가?(스포주의) [6] 왜냐하면 2019.07.18 1352
109174 참새가 귀여우면서 카리스마 있게 생겼군요 [6] 가끔영화 2019.07.18 963
109173 [EBS1 영화] 집시의 시간 (내일 밤이군요.. ㅠㅠ) [20] underground 2019.07.18 924
109172 배스킨 라빈스 사태에 대해 생각할수록 역겹고 소름끼치네요. [44] 일희일비 2019.07.18 2472
109171 ”더 뮤즈 드가 to 가우디“ 등 다양한 전시회 리뷰, 추천 [8] 산호초2010 2019.07.18 7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