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3회까지 본 후기

2020.09.27 14:32

Sonny 조회 수: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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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씁니다.


- 보건교사 안은영은 어떻게 봐도 무당 이야기입니다. 안은영의 직책만 보건교사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무당이 하는 일이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무당의 행색이고, 그가 하는 일이 무당의 굿판입니다. 안은영은 하얀 소복에 알록달록학 오방색 검을 휘두르며 원귀를 내쫓습니다. 안은영만이 볼 수 있는 것은 억울하고 서럽게 죽은 이들과, 어딘가 꼬여있는 이들의 정신적 상처입니다. 안은영이 젤리 모양의 귀신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엑소시스트>처럼 음산하고 절박한 무엇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비정상적 착란 상태에 빠져서 대단히 시끄럽고 몸이 통제가 되지 않는 난장판입니다. 떠들썩하고 뭔가 신명이 나는 상황입니다.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안은영은 "줌바" 같지도 않은 몸짓으로 그 현장을 가라앉힙니다.


왜 현대에 무당이 소화된되어야 하는가. 그 의미를 바로 해석하자면 이 세계의 잘못된 시스템과 "정상"이라는 다수의 가치관이 사람들의 혼을 다치게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일까요. 보건교사가 신체만 다스려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혼까지 어루만져줘야 합니다. 원귀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그것도 결국 사람이 직접 쌓은 업입니다. 그런데 그 업이 그저 나쁘고 못된 사람들 개인의 심성에 따른 결과인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세계를 자극하는 사회적 시스템 때문입니다. 농구부 주장이 (쪽팔린지도 모르고) 다수의 군중 앞에서 강압적으로 고백을 하는 첫번째 에피소드나 방석을 훔쳐서 성적을 올리려는 두번째 에피소드, 집안 환경을 가지고 한 명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세번째 에피소드가 그런 것들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원은 그냥 쌓이는 게 아니라 이미 억압과 착취를 강제하는 사회 자체에 있습니다.


안은영은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이국종처럼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가 보는 원령이나 젤리들의 세계는 모두 결과물입니다. 그런 것들이 왜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산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제 멋대로 안은영의 이름이 안安은 영靈에 있다는 뜻은 아닌지 가설을 세워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영은 편안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결국 육신을 가진 산 사람들이 현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 보건교사 안은영은 엄청나게 한국적인 이야기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것은 안은영이 무당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당이 왜 한국적이고 따로 구별이 되는지 좀 곱씹게 됩니다. 서양에도 마귀와 귀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입니다. Father God의 선과 의지에 따라 신부, 목사, 또는 그걸 다룰 줄 아는 카우보이들이(콘스탄틴이 있겠네요) 그 악령들을 쓰러트리고 내쫓습니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신을 계승한 현세의 남성들이 그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합니다. 이 구도에서 여성은 피해자로서 일방적인 구원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신이 정한 질서의 회복이며 "악"을 사라지게 하는 이분법적 해결입니다. 하나님이 선이고, 귀신은 악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남성의 의지와 믿음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토속신앙인 무당들은 대개 여성입니다. 이 근본적인 성별의 차이부터 문제해결의 상이한 개념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서양에서의 퇴마가 남성적 질서를 남성이 스스로 회복하고 책임을 지면서 여성을 피해자의 위치로 소외시키는 과정이라면, 동양의 퇴마는 귀신이나 악령같은 현상의 해결을 여성에게 하청을 주는 방식입니다. 무당은 예전부터 천대받는 직업이었죠. "욕받이"라는 개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듯, 가장 어둡고 꿉꿉한 영역의 일은 남자가 굳이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남존여비의 사상 아래에서 역설적으로 귀신과 만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 여성이 등장합니다. 세상의 원과 고통을 가장 천한 '여자'가 다룰 때 이것은 페미니즘적인 성격을 띄는 게 아닐까요. 가장 약하고 천대받는 현실의 존재가 살아있거나 죽은 자들의 꼬여있는 영의 세계를 다시 풀고 회복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 서사에는 "귀신을 달랜다"는 표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무당이 맡고 있는 역할이 악을 쓸어버리는 선의 대표 청소부나 치안담당이 아니라, 세계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그것을 다시 제대로 돌아가게끔 하는 caregiver의 의미가 부여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여성혐오의 연장일수도 있는데 남성중심사회가 여성에게 바라고 책임지우는 것이 바로 그런 어머니로서의 성질이기 때문이죠. 무당은 이 상태를 악이라고 보기보다는 혼란이라고 보는 것에 더 가깝고 이것을 조화롭게 돌리는 게 그 본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 그러니까 삐끗하면 무당 서사는 전통적 여성의 미덕을 발휘하는 어머니나 성녀의 함정에 굴러떨어지기 쉽습니다. 모성이라는 판타지로 한없이 안아주고 포용해주는 정신적 노동을 여성의 영웅적 행위로 오해할 여지가 큽니다. 이 지점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나름의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은영은 사람들과 별로 친하지도 않고 어머니는 커녕 누구의 여자친구도 할 생각이 없으며 세상이 기대하는 다정함을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원한을 발견하고 이해하지만 그것을 본인의 애틋한 심성으로 포용하지도 않습니다. 알긴 알되 심정적인 에너지를 쏟아가며 어루만지지 않습니다. 욕이나 퍼붓고 치워버리는 거죠. 안은영은 "씨발" 소리를 입에 달고 삽니다.


특별한 힘을 가진 여자 주인공 옆에 약자로 취급당하는 남자 주인공이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가 형성이 될 수록 여자 주인공에게는 이 남자를 향한 애정과 헌신이 의무가 될 수도 있는데... 안은영은 홍인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는 남자를 챙겨주거나 걱정하지 않죠. 그는 그냥 좀 띠꺼운데 아주 요긴한 사람이고 자신의 사정을 이해하는 친구입니다. 홍인표는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남성적 매력이나 권력(지식, 돈, 육체적 힘)도 없는 인간이지만 오로지 안은영에게만 쏠쏠한 보탬이 되는 사람이고 그가 안은영에게 남성으로서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여성을 착취하지 않은 채 온전한 활약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영적 빠떼리"로서 홍인표가 안은영의 곁에 있는 것은 그 동안 칼을 휘두르는 용사 옆에서 깔짝깔짝 마법을 쓰고 사랑을 챙겨주는 여성조연 구도에 대한 미러링처럼도 보입니다. 아무튼 둘의 관계는 썩 평등합니다.


- 이 드라마의 "시크한" 지점은 인간의 고통을 그리면서도 그결 다루는 입장에서 덤덤하게 바라보는 거리에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사람이 

당하는 상처가 이렇게 끔찍하고 고통스러워... 하면서 울거나 소리지르는 대신 그걸 욕이나 퍼붓고 매번 인상 찌푸리며 피곤해하는 안은영의 얼굴로 대체해 거리감을 만드는 거죠. 환자를 대하는 전문직 의사의 empathy라고 할까요. 젤리가 되어 흩어지는 원귀들은 심령현상에 대한 심각한 태도를 비웃는 것 같은 분위기마저 있습니다(오씨엔 드라마들이여...!!)


젤리 소리가 계속 나면서 귀신 이야기라는 장르에 도저히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드라마 특유의 귀여움이야말로 사회적 현상을 더 냉철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지점 같습니다. 드라마 자체가 스스로 이 이야기는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고 마음대로 할 겁니다... 라는 태도의 선언을 하면서 그걸 보는 시청자도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쏘울 수족관 쇼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러브크래프트 이야기를 하던데 그건 또 묘하게 들어맞더군요ㅎㅎ 아주 깊은 지하에, 어떤 비석이 있는데... 그걸 들춰냈더니!! 흐아아아아


- 이 드라마를 보면서 확실히 알게 된 건, 마틴 스콜세지가 맨날 갱스터 이야기만 하듯이 이경미는 자나깨나 학교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가 만든 장편의 두 영화 모두가 학교라는 특정한 공간에서만 성립하는 이야기였고 보건교사 안은영 역시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약간 시험작 같아요) 이경미 월드의 여자들은 자신이 자라나는 그 시간이 배어있는 학교라는 공간을 다시 찾아서 자신이 놔두고 온 것과 잃어버린 것들을 다른 소녀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학교는 전혀 실효성 없는 질서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그 질서를 깨부수고 일탈하면서 피가 나오는 자유를 만끽합니다. (미쓰 홍당무에서 피가 어디 나오느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양미숙의 홍조증이야말로 흘리지만 않았지 피가 잔뜩 몰린 결과 아니겠습니까!)


되게 엉뚱한데 살벌한 이야기입니다. 이경미는 <잘돼가? 무엇이든>에서부터 회사를 홀랑 태워먹었는데 학교를 부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보건교사 안은영의 첫번째 에피소드부터 학교의 옥상과 지하실, 그러니까 맨 아래에서부터 맨 위까지 공간 전체가 요동을 치면서 한번 박살이 났습니다. 세계를 일단 수직으로 균열을 내놓고 이경미는 자신의 세계에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안은영이라는 여자의 활극도 있겠지만 이 여자가 보여주는 태도가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여자는 이런 세계에서 어떤 처신머리를 펼치고 있는가. "내가 진짜 기가 막혀서..."라는 여자의 온갖 제스처를 말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꼭 무슨 정의나 대단한 올바름이 아니라 자기가 봐도 자기가 엉뚱하고 미친 여자 같은데, 세상이 이모양이니 이 정도는 좀 웃고 넘어가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자조인 것 같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게 이경미 월드의 교장들이 보여주는 또라이스러운 엄숙한 태도가 아닐까요. 따라는 하는데 도대체 뭔지 모르겠고 진지한 척은 해야겠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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