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살해

2021.03.27 09:24

어디로갈까 조회 수:993

# '시간의 살해 Tempo-cid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하나의 시간대에 눌러붙어서 나머지 시간대를 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는Futurism 미래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현재와 과거를 살해했고, 한국의 환단고기주의는 과거의 상상적 영광을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현재와 미래를 살해한 바 있습니다.

데리다를 읽노라면, 이 템포사이드 현상을 회피하거나 저지하기 위하여 '도래하는 유령' 같은 개념 조작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1993년 이후의 세계는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마르크스주의가 퇴락해가는 풍경으로 가득 채우는 걸 보면서요. 그즈음에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죠. "죽은 마르크스가 유령이 되어 되돌아온다, 자신의 적들의 유령들과 함께." 
그러나 유령이란 도착하지 않습니다. 단지 도래하는 스탠스를 유지할 뿐이죠. 그러므로 그것은 데리다 특유의 시제인 전미래 시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나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되되어 있다." 
지난 밤 꿈속에서 왜 F. 실러의 이런 자문을 제 것인 양 내내 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겠으나 적잖이 시달렸던 것 같아요. ' 나는 시간의 살해'를 범하고 있는 걸까. 아름다운 예술들과 결별하고 지금 과거를 회상하고 있거나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걸까? 그런 일을 범하지 않으려던 긴장도 사라진 걸까?'

'시간의 살해'를 잠시 멈추고, 흐르는 시간 속에 다시 놓이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철학자가 자신의 과거는 행동으로 사라져 버리는 지점에 정확하게 위치하게 된다고 말한 게 생각납니다. 이때의 행동은 뇌의 행동을 의미하죠. 그래서 뇌의 행동을 보여주고자 좀전까지 눈을 빠르게 깜빡여 봤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위치하는 게 정신인지 신체인지 모르겠더군요.

저의 뇌는 자는 동안 무슨 행동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기억을 반추하거나 어떤 습관을 떨쳐내려는 것이었을까요.  하나는 긍정이고 또 하나는 부정이지만, 양자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분기억이든 전체기억이든 상대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요.
막내가 카톡에다 "떨쳐내려는 짓은 오히려 자유로운 자의 제스처가 아닐까"라고 의견을 밝혔는데, 사실이죠. 그런 짓은 외려 다시 들러붙게 만들죠.  어느 철학자의 충고대로 했다가는 '시간의 살해'보다 못한 굴레에 휩싸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우리회사는 구성원 대다수가 외국인어서 상대를 호칭할 때 그냥 이름만 씁니다. 공적인 문서나 메일에만 이름 옆에 괄호로  ESN. DPN, BSJN, JMN, SMN, ESN등으로 직급 뒤에다 알파벳 'N'을 붙이고요. 하지만 한국인 동료들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깍듯하게 직급호칭을 사용하죠. 
기억하시는 분은 하시겠지만, 예전에 제 발등에 뜨거운 물 쏟은 후 수백만원짜리 의자를 보내서 저를 한숨/눈물짓게 했던 친구가 어제 회식자리에서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팀장님. 앞으로는 업무 시간까지만 팀장님이라 칭하고 그 외 시간에는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사실 그게 정당한 호칭법 아닌가요."
- 씨는 굳이 왜 붙여요. 그냥 **아 라고 불러도 돼요. (진심으로 한 말입니다. 씨익~) 
"그래도 되는 거죠?"
- 답했잖아요. 할지말지 내게 묻지 말아요.. 당신이 결정할 일이에요.

가끔 손을 뻗어 상대의 뺨을 만져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홀로 정리하고 결정한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하는 사람을 볼 때요. 물론 그런 상황에서 유혹이 인다고 마음가는 대로 상대의 뺨을 터치하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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