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e01.jpg


@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을 듣고 와서 쓰는 리뷰이니 제가 혼자 하는 독해는 아닙니다


이 영화의 첫장면은 조금 이상합니다. 일단 구도적으로 불균형합니다. 굳이 미술을 배운 사람이 아니어도 이 장면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여자가 탁자 앞에 앉아있는 거리와 그 건너편의 의자가 탁자 앞에 놓인 거리는 대칭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자 앞에 상대방이 앉을 자리만 멀찍이 떨어져있고 훨씬 더 큰 공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의자에는 지금 아무도 앉아있지 않습니다. 빈 의자가 탁자와 먼 거리에 놓여서 생기는 이 빈 공간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재'를 느낍니다. 뭔가 더 붙어있어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있고, 뭔가 채워져있어야 하는데 그게 비어있습니다. 영화는 그 공허함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이 프롤로그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해집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형사가 살인자를 쫓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형사와 살인자의 이야기인데 왜 굳이 형사의 아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일까요. 가장 기본적인 범죄 영화의 프롤로그는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이 어떤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형사가 이걸 추격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추격전은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릴 것입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남편과 아내의 부부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영화 내용도 그렇게 끝납니다. 형사가 범인을 만나서 그를 체포하거나 죽이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형사의 아내가 죽으면서 기본적인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것을 부부이야기라고 친다면 저 빈자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남편일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형사가 범인은 쫓는 이야기 가운데에 계속 형사 주인공이 집에서 아내를 마주하고, 그 아내의 정신질환을 어쩌지 못해서 그 고통을 범인에게 토로하는 장면들이 섞여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내에게 소홀한 남편의 가정 드라마라는 건 아닙니다. 이것은 애정이나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상실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 빈자리가 남편의 자리라면 과연 저 자리는 채워질 수 있을까, 혹은 가까워질 수 있을까. [큐어]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전체에 걸쳐서 드러나는 주제이지만 해당 장면 바로 다음의 장면에서도 암시되는 주제입니다.


cure02.jpg


저 병원에서 여자가 읽고 있는 책은 샤를 페로가 쓴 푸른 수염을 다룬 책입니다. 이 동화를 생각해본다면 이 여자가 아내로서 현재 처한 심리적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직감하게 됩니다. 푸른 수염이란 동화는 남편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 아내가 남편에게 죽을 뻔 하다가 역으로 남편을 죽이고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약 극 중 이 부부를 상징하는 이야기라면 저 아내는 남편의 비밀을 뭔가 발견했거나, 남편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부가 가진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가정 폭력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부부는 지금 관계가 흔들리고 있고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남편이 아내의 정신질환 때문에 고립과 무력감을 느낀다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푸른 수염이라는 동화를 뜯어보면 이 이야기도 그 자체로 괴상합니다. 이야기 안에 어떤 금기가 나오면, 주인공은 반드시 그 금기를 어깁니다. 주인공은 남편인 푸른 수염이 열지 말라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가 전 아내들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금기를 어긴 벌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푸른 수염이 이 아내를 죽이려할 때, 오빠들이 등장해 푸른 수염을 역으로 죽입니다. 금기에 의한 벌을 받기 직전에 구출된거죠. 금기가 작동을 하다가 멈춘 것도 이상하고, 금기의 집행자인 푸른 수염이 너무 맥없이 죽어버리는 것도 이상합니다. 푸른 수염이 사악한 남편이었고 착한 여자는 그에게 죽기 전에 무사히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차라리 그가 혼자 이 비밀을 파헤쳐낸 다음 남편에게 이 죗값을 묻는 이야기가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이 이상한 구조에서 강조되는 것은 남편의 엄청난 권력과 '비밀'이라는 은밀한 심리적 영역입니다. 푸른 수염이 죽었어도 그에게 죽을 뻔한 주인공의 공포가 훨씬 더 선명하게 각인됩니다. 


정말 중요한 디테일은 저 책이 푸른 수염이라는 동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 책은 Helmut Barz라는 정신의학박사가 푸른 수염이란 동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푸른 수염을 읽고 있다는 것과 푸른 수염을 분석한 책을 읽고 있다는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는 저 책을 읽으면서 부부관계의 근본적인 실패를 해석해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부부관계에서의 문제해결을 저 책을 통해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해석이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대응책을 찾아나가려는 행위이니까요. 그러나 이 다음에 이어지는 아내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는 빠르게 다리를 떨고 탁자에서는 부딪히는 소리가 달그닥거리며 납니다. 이후 영화에서는 내내 진동하는 굉음이 이어집니다. 아내가 다리를 떠는 소리는 이 굉음의 전조인 셈입니다.


아내는 의사에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아요. 끝에 가서는 그 딸이 푸른 수염을 죽여요.' 푸른 수염을 분석하는 책을 읽었지만 아내가 기억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아내가 남편을 죽인다는 사실입니다. 푸른 수염을 분석하는 책을 읽었지만 기억하는 것은 죽인다는 행위 하나뿐입니다. 이것은 이 영화 내내 반복되는 컨셉입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분석해보려해도 결국 모든 행위가 살인이라는 종착지로 이어지면 어떻게 하겠냐는.질문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푸른 수염은 비밀을 안 다음에는 결국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관계의 근본적 절망을 이야기하는 동화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비밀을 알아차린 쪽이든 비밀을 발각당한 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 프롤로그를 통해 이 영화 내용을 거의 함축해놓고 있습니다. 다시 보면 섬뜩한 장면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1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6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79
126099 구글에 리그앙 쳐 보면 new daviddain 2024.04.29 37
126098 의외의 돌발변수가 출현한 어도어 경영권 전개... new 상수 2024.04.29 169
126097 눈 체조 new catgotmy 2024.04.29 36
126096 [핵바낭] 또 그냥 일상 잡담입니다 [5] update 로이배티 2024.04.29 254
126095 글로벌(?)한 저녁 그리고 한화 이글스 daviddain 2024.04.28 131
126094 프레임드 #779 [2] Lunagazer 2024.04.28 38
126093 [애플티비] 무난하게 잘 만든 축구 드라마 ‘테드 래소’ [8] update 쏘맥 2024.04.28 189
126092 마이클 잭슨 Scream (2017) [3] catgotmy 2024.04.28 138
126091 [영화바낭] 영국산 필리핀 인종차별 호러, '레이징 그레이스' 잡담입니다 로이배티 2024.04.28 180
126090 시티헌터 소감<유스포>+오늘자 눈물퀸 소감<유스포> [5] 라인하르트012 2024.04.27 311
126089 프레임드 #778 [4] Lunagazer 2024.04.27 52
126088 [넷플릭스바낭] '나이브'의 극한을 보여드립니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잡담 [2] 로이배티 2024.04.27 258
126087 민희진의 MBTI catgotmy 2024.04.27 360
126086 민희진이라는 시대착오적 인물 [10] woxn3 2024.04.27 912
126085 레트로튠 - Hey Deanie [4] theforce 2024.04.27 69
126084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극장에서 보고(Feat. 파친코 김민하배우) [3] 상수 2024.04.27 224
126083 Laurent Cantet 1961 - 2024 R.I.P. [1] 조성용 2024.04.27 112
126082 뉴진스팬들은 어떤 결론을 원할까요 [8] 감동 2024.04.27 667
126081 장기하가 부릅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자본주의하는데 방해돼) 상수 2024.04.27 271
126080 근래 아이돌 이슈를 바라보며 [10] 메피스토 2024.04.27 59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