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헌트]의 정치적 방향에 대해

2022.08.20 13:14

Sonny 조회 수: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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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정의로운 검사가 주인공인 영화를 못봅니다. 그런 검사도 있을 순 있겠지만, 현실에서 검찰이라는 집단의 평균적 수준이 너무나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티비 드라마와 영화들이 줄기차게 울궈먹었던 검사라는 권력의 미화가 일으킨 참사일지도 모릅니다. 픽션 속 권력을 가진 존재로 휘두르기에는 참 편리하니 현실의 지위에 픽셔널한 외모와 의협심(...)을 부여했겠지만 현실의 검사는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죠. 저는 아버지가 법조계 지인들을 많이 알고 계셔서 실제로 접할 일들이 있었는데 그냥 다 천종호 판사님같이 생겼고 정의로움은 쥐뿔도 없습니다. 그냥 회사원들입니다. 검은 양복 입은 건 본 적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기부라는 조직을 픽션이 미화하는 현상은 이제 좀 멈춰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비슷한 지적은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나왔는데, 이 소재는 지나치게 편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픽션들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남성 조직의 폭력과 야만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소외나 비애, 즉 고독한 영웅의 슬픔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조폭을 소재로 하면 배경이 좀 구시대적인데다가 압도적인 권력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힘드니 대체재로 픽션들이 안기부를 고르는 것이라는 혐의가 있지요. (한국에서 조폭물은 박훈정이 [신세계]로 그 단물을 다 빨아먹었으니 한동안은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안기부를 소재로 다루면 여러가지 이득이 따라옵니다. 밑바닥 세계가 아니라 한국 내 권력의 최상층부를 그린다는 점, 소재 선택만으로 역사적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다는 점, 실제 소재를 가지고 오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는 점, 총기 액션을 다루기 더 쉬워진다는 점, 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 장면들을 삽입하면서 작품 내 폭력적인 절망감을 표현하기 쉽다는 점, 이지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양면성을 다룰 수 있다는 점... 안기부를 안기부 직원들의 시점에서 (특히나 고위층의 시점에서) 그리면 이것은 이들이 관리하는 조직 이야기가 됩니다. 깡패 이야기인데 외피를 다른 걸 두르는 거죠. 


인간 문명이 워낙에 남성중심적 사회이니 영화의 커리어도 그렇게 발전하는 거겠습니다만은, 한국에서 흥행을 친 조폭물을 다룬 감독들이 그 다음에 "역사적 소재"로 넘어가는 게 좀 흥미롭습니다. 우민호는 [남산의 부장들]을 찍기 전에 [마약왕]을 찍었고, 최동훈은 [암살]을 찍기 전에 [타짜]를 찍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일 방향성이 두드러지는 게 김지운입니다. 그는 [밀정]을 찍기 전에 [달콤한 인생]을 찍었습니다. [밀정]같은 경우 왜 이 독립투쟁 영화를 이런 식으로 찍었을지 좀 이해가 안갔었는데 이 작품을 조폭물의 공식으로 보니까 그제서야 이해가 가더라구요. 한국 영화는 독립투쟁의 역사조차도 범죄조직들의 뒷골목 싸움으로 그리고 싶어합니다. 다크 히어로에 대한 낭만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만 어벤져스를 위시한 라텍스 히어로들로 헐리우드의 역사를 진행시켜나가던 미국에 비하면 한국의 액션 영화들은 아직도 8090년도의 조폭 영화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의심이 들죠. 


[남산의 부장들] 정도면 그래도 대중영화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의 반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다른 영화들을 놓고 볼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 영화에도 조직 안에서 1인자에게 버림받을 2인자의 서글픈 숙명에 대한 연민이 철철 넘칩니다만, 그래도 박정희를 '지삐 모르는 개꼰대'로 그려놓고 그 조직 자체를 어리석은 충성경쟁을 보이는 비합리적 조직으로 묘사는 해놓았으니까요. [밀정]은 지금 보면 정말 당혹스러울 정도의 조폭미화입니다. 우리 국가(조직)을 위해 너희 국가(조직)의 더러운 앞잡이들을 은밀히 처리해주겠다는 이 폭력에 대한 미화는 정말 이상합니다. [그림자 군단]을 찍은 장 삐에르 멜빌이 보면 통단을 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낭만을 담으라 했냐면서 뺨을 후려칠지도요. 여담입니다만 멜빌 영화에서의 폭력성을 사무적인 태도에서 나오지 폭력의 비장한 미쟝센을 통해 나오지 않습니다. 알면서 왜그러는지...


다음에 또 살펴볼 수 있겠죠. 조폭 영화로 히트한 감독이 어떤 역사적 드라마로 자기 커리어를 빌드업해나갈지. 이런 장르적 도전은 한국 사회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그저 폭력배에 대한 불필요한 감흥 같아서 이제 좀 우려가 됩니다. 미학적으로도 더 이상은 파낼 게 없는 소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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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가 정말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제일 혐오하는 타락으로부터 배제시키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 영화는 고문 장면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근안을 모델로 했을 고문기술자 캐릭터에게 냉소를 보내면서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인 박평호와 김정도는 그 혐의를 벗어납니다. 그렇지만 이 인물들이 고문을 안했겠습니까. 영화 상에서도 이들이 고문을 지시하거나 지켜보는 모습은 나옵니다만 실제로 고문을 하는 "더러운" 장면은 안나옵니다. 그걸로 이 영화는 두 인물을 안기부라는 세계 안 폭력이 묻는 걸 막아주고 있는 셈이죠. (김정도가 고문을 하는 장면은 같은 편의 선배를 희생시키는 "비장한" 장면으로 처리됩니다)


한 배우가 유사한 역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전작을 환기하게 됩니다만, 전 이 영화가 사실은 [신세계]의 후속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평호가 영화 초반 송영길이 분한 안기부장을 부정축재로 처리해버릴 때, [신세계]에서 최종 쿠데타에 성공했던 장면이 좀 떠오르더군요. 그 시대에 있기 힘든 깔끔한 항명이자 숙청입니다. 김정도는 정청과 중구형님이 서로 아웅다웅했던 라이벌 관계를 이정재 자신이 정우성을 섭외해 훨씬 더 끌어올린 버젼입니다. 그리고 정청과의 브로맨스를 조금 은은하게, 옅은 버젼으로 나누는거죠. 칼보다는 훨씬 더 품위있는 총으로 싸우구요. 프락치 신세에 지겨워하는 것이 두 영화의 공통된 테마입니다.


그들은 너무 말끔하고 고급스럽습니다. 이 부분이야 감독인 이정재가 워낙에 패션을 좋아하니 영화조차도 패셔너블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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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것을 지향하는 보수성이 엿보인단 평을 봤습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가장 권력의 상위층에서 중년 남성들이 나라의 운명을 향방짓는다는 설정은 그냥 넘깁시다. 이 영화의 최종 목적이 "국가"라는 것에서 의문을 품게 되죠.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한다는 그 가치관은 이들이 같은 편을 희생시킨다는 그 방법론에서부터 '전쟁만은 막아야한다'는 박평호의 결론까지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왜 박평호와 김정도는 전쟁도 막으면서 암살을 수행할 거라는 방향으로는 끌고 나가지 못한 것인지요. 민주세력의 시위를 아예 배제했다면 적어도 영화 내에서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은 양립할 수 있는 목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할텐데요.


그런 부분에서 이 영화의 엔딩도 조금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박평호는 조유정에게 탈출을 권유합니다. 탈정치를 권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국가라는 조직에 저항할 수 없다는 은밀한 절망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복종 아니면 도피뿐인 양자택일의 세계에서 혁명은 김정도처럼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현실적인 체념이 깔려있습니다. 그는 조유정에게서 희망을 보기 보다는 결구 다 똑같을 수 밖에 없는 조직의 권력만을 확인합니다. 


물론 안기부 영화에서 독재자를 응시하고, 독재자에 대한 분노를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진취적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틀안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도 줍니다. 데뷔작으로서는 훌륭하지만 한국 영화들의 선상에서는 그 다음작품을 기다려야하는 계기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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