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정신과 관성

2022.08.24 01:27

안유미 조회 수:365


 1.요즘은 술을 먹다가도 12시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요. 자정이라는 시간은 사실 술자리에서 떠나기 아쉬운 시간이예요. 밤 12시까지는 일상의 시간이지만 12시부터는 일상이 비일상으로 변하는 시간, 밤의 마법이 시작되는 시간이니까요. 그 시간대부터는 내가 조인성이 아니더라도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인거죠.


 하지만 그래도 아예 새벽 3시, 5시까지 술을 마실 게 아니라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죠. 이유는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 위해서예요.



 2.예를 들어 여의도에서 술을 마신다면? 12시 20분 즈음이 막차인 461번을 노릴 수 있어요. 강남역이나 신논현에서 느지막히 나온다면 643번을 노려볼 수 있죠.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그것들을 놓친다면 나는 머릿속으로 맵을 그려요. 지금 이 시간...마지막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계산으로요. 서울을 지그재그로 가로질러서라도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돌아갈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요.


 그러면 여의도에서 숙대입구 가는 버스를 타고 숙대입구에서 내려 502번을 타볼 수 있죠. 아니면 361번을 타고 강남까지 간 뒤 거기서 남은 마지막 버스들을 노려볼 수도 있고. 강남에서 643번을 놓쳤다면 신논현에서 미친듯이 뛰어서 4212번 정류장까지 가서 막차를 기대해 볼 수도 있어요.


 굳이 말하자면 이건 주어진 조건 안에서 교통비를 최대한 아끼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떠올려볼 수 있는 모든 루트를 동원해서 최후에 남은 막차를 타야 한다...라는 계획을 세우고, 그게 맞아떨어지면 택시비를 아낄 수 있는 거예요.



 3.여러분은 택시 타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택시를 탄다라는 것을 거의 용납할 수 없어요. 그야 어쩔 수 없을 때는 탔었고, 돈을 펑펑 쓰고 다닐 때는 별생각없이 탔지만...역시 대중교통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있는데 택시를 탄다는 것은 너무 돈이 아까워요.


 하지만 이 세상엔 택시를 쉽게 쉽게 타는 사람이 많아요. 전혀 부자가 아닌데도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몰죠.



 4.휴.



 5.아마도 내가 택시를 타기 싫어하는 건 관성의 법칙 때문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택시비라는 건 너무 아까운 돈이었거든요. 같은 거리를 몇백원이면 갈 수 있는데 2만원씩 내고 가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말이죠. 그래서 다른 소비는 몰라도 택시만큼은 묘하게 아끼는 편이예요.


 그렇다면 비싼 코트라던가...누군가의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술 한병이라던가...호텔 객실같은 건 어떨까요? 그것도 아깝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그런 건 어렸을 때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것들에는 돈을 쓸 수도 있어요. 하지만 택시비는 어렸을 때부터 '택시를 타는 건 낭비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왔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택시비는 아까워요. 관성을 되돌리기는 힘든가봐요.



 6.그건 케찹도 그래요. 그야 그까짓 케찹은 한통 사도 되긴 해요. 하지만 역시 케찹을 돈 주고 사는 건 아깝거든요. 그래서 버거킹에 갈 때마다 케찹 1~2개정도를 더 받아오곤 해요. 그렇게 케첩을 쟁여 놓으면 나중에 소시지를 먹거나 할때 굳이 돈 주고 케첩을 살필요 없거든요.


 그건 머스타드 소스도 그래요. 치킨을 시키거나 할때 오는 머스타드 소스를 안 먹고 모아두면, 나중에 머스타드 소스가 가끔 필요한 음식을 먹을 때 충분한 양의 머스타드 소스를 공짜로 확보해둘 수 있죠.


 물도 그래요. 요즘 하루에 2리터가량 물을 먹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생수값이 좀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일반 식당에서는 그러지 않지만, 차를 끓여서 내오는 가게나 생수를 주는 고급 식당에 가면 거기서 물을 실컷 마셔두죠. 하루 할당량 2리터의 물을 마시는데 그걸 다 돈주고 마시면 아까우니까요.



 7.어제는 커피 사업을 하는 사람-이하 커피맨-이 생일이라고 뭔가 사주러 왔어요. 샤브샤브가게에 갔는데 그가 '알고보니 아버지가 4천억 부자를 알고 있더라고요.'라고 운을 뗐어요. 그런데 그 4천억부자는 엄청난 짠돌이인가 봐요. 아직 커피머신이 없다고 해서 커피맨이 커피머신을 소개해 줬다더라고요. 그런데 그가 '싼 커피머신은 4만원짜리도 있고. 좋은 건 80만원정도 합니다.'라는 말을 끝내자마자 4만원짜리 커피머신을 주문해 달라고 했대요. 커피맨은 왜 4천억 부자가 4만원짜리 커피머신을 사는지 의아해했어요. 그가 80만원짜리 커피머신을 사든 4만원짜리 커피머신을 사든, 그에게는 사탕 한알 사먹는 것과 같을 테니까요.


 사실 내가 이상하게 여긴 건 4천억 부자가 4만원짜리 커피머신을 샀다는 게 아니라, 80살이 넘은 4천억 부자에게 아직까지도 커피머신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그 4천억 부자가 4만원짜리 머신을 고른 부분은 그래도 이해가 갔어요.   


 그래서 '아마도 관성 때문이 아닐까요? 평생 아끼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돈을 펑펑 쓰는 건 가오가 안사는 거잖아? 그에게는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돈을 안쓰고 절약하는 게 가오잡는 것일 테니까.'라고 대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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