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무라 사다코

동양 호러영화 장르에서 흰 옷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 귀신은 클리셰를 넘어선 전통입니다. 너무나도 문화 속에 깊이 박혀있어서 잘라내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죠. 아직도 우린 '귀신'하면 하얀 소복을 입은 긴 머리 여자를 떠올리잖아요. 몇 년 전까지만해도 긴 머리 여자 귀신을 등장시키는 건 표절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술적으로 안이하거나 전통주의자라는 증거일 뿐이었죠.

이렇게 당연하고 뻔한 이미지가 갑자기 상표를 달게 된 건 나가타 히데오의 [링]부터였습니다. 야마무라 사다코가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텔레비전에서 기어나온 것이죠. 너무나도 무신경해서 오히려 대담하게 느껴지는 이 터치는 그 영화 속에서 먹혔고 그 장면은 곧 전세계 호러 영화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기억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문화권마다 조금 달랐겠지만요.

사다코의 등장은 지금까지 유행에 뒤떨어져 장르의 창고 속에 박혀 있었던 긴 머리 여자 귀신들의 르네상스를 열었습니다. 홍콩의 [디 아이]에서부터 한국의 [장화, 홍련]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출연하지 않는 호러영화들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70년대 긴머리 유행을 핑계삼아 리메이크 버전 [링]을 통해 할리우드로 진출하기까지 했지요.

다른 나라의 사다코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전 할리우드 사다코, 아니, 사마라의 고딕적 이미지가 나름대로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호러영화의 사다코들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해야겠습니다.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장화, 홍련]이나 [폰] 정도만 되어도 전 이해를 합니다. 여전히 머리 긴 여자 귀신이지만 사다코에서 벗어나려는 분명한 시도가 보이기 때문이지요. 등장하는 방식도 그렇고, 비주얼도 그렇고요. 관객들이 사다코를 머리에 박고 그 영화들을 본다고 해서 감상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에 나오는 여자귀신부터는 좀 심각합니다. 창문을 통해 기어나오는 이 긴 머리 귀신에서 사다코를 떠올리지 않는 건 정말로 힘들 거든요. 데자뷔가 너무 강해서 공포 효과 자체가 사라져버립니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은 그 뒤에 나오는 호러영화들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올해 여름 호러영화 시즌을 연 [령][페이스]는 표절이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긴 머리 귀신들은 사다코를 벤치마킹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사다코입니다. 로얄티라도 줘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공포효과 따위도 없습니다. 관객들은 놀라기보다 그 뻔뻔스러운 표절에 어이없어 할테니까요.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일반적인 긴 머리 귀신과 사다코는 같지 않습니다. 긴 머리로 얼굴 전체를 가린 유령이 한쪽 눈알을 부라리는 장면을 넣으면서 일반적인 긴 머리 여자 귀신을 넣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한마디로 염치가 없는 거예요. 한심하게도 [령]과 [페이스]의 긴 머리 귀신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다코의 눈알 부라리기를 흉내내고 있습니다. 잘 하지도 못해요. 그냥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거죠.

예고편과 스틸을 보니, 안병기의 신작인 [분신사바]에도 사다코는 등장하나 봅니다. 안병기는 그래도 장르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 안심을 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사다코의 저주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아요. 나중에 나온다는 [인형사]는 소재부터 노골적인 일본색을 내세우는 영화이니 포기했고요.

호러 영화에서 긴 머리 여자 귀신을 추방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설의 고향]을 보면서 호러장르의 감을 익힌 전 여전히 이들을 사랑해요. 하지만 이들에게 맨날 사다코 헤어스타일과 소복을 강요하는 최근의 이상한 유행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도대체 뭣들 하는 짓입니까? 한참 멋내고 싶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나이에 죽은 귀신들에게 이건 패션 억압입니다. 제발 부탁이니, 이들에게 다양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허가해주지 않겠습니까? (04/06/17)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