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 있는 사랑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난폭한 로맨스 때문에 이시영에 관한 호감도 있었고, 예고편을 봤을 때 순정만화 종합세트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기대도 있었지요.

 

6화 후반부까지 드라마는 순정만화의 정석을 제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여고생과 선생님의 사랑, 첫사랑과의 결혼, 갑자기 나타난 연하의 멋진 남자, 연하남과의 로맨스. 거기다 플리시백까지 자주 사용해서 저 사람의 저 행동이 그런 의미였구나 하면서 별거 아니었던 장면을 콩닥콩닥하는 장면으로 바꿔 놓기도 잘했죠. 예를 들어 김목수가 얼음물에 손을 식히는 장면.

 

하지만 시댁의 노예냐는 김목수의 말에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냐, 나도 힘들다고 외치며 대성통곡하는 김일리를 보는 순간 이건 순정의 탈을 쓴 불륜 삼각 드라마가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사랑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벌어지는 착취가 이 드라마의 진정한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낮에는 도장공, 밤에는 전신마비인 시누이 수발, 뻑 하면 싸우는 시부모 말리기, 생양아치인 시동생 잡도리까지. 처음에는 시집살이 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자기네 아파트는 따로 있고, 시댁에서는 시누이도 보살피고 살림도 하더군요. 남편, 시부모, 친정 어머니, 여동생 모두 김일리가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적극적으로 김일리가 그 상황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지는 않아요. 시누이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말을 꺼냈다가도 일리가 반대하니까 그냥 조용히 수그러들죠. 김일리 한 사람만 희생하면 자신들은 희생할 필요 없이 계속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 며느리아내를 결혼과 함께 제공되는 무보수 노동력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관습이라든지 가족의 도리, 모성애라는 말로 잘 포장돼 있지만 결국 이건 사랑하니까, 가족이니까라는 말 아래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착취죠.

 

여성이 직업을 가지기 전까지는 이런 며느리로서, ‘아내로서의 노동이 일방적인 착취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임무를 수행할 시간도 있었고, 정신적 육체적 여유도 있었으니까요. 돈을 벌어서 생계를 책임진다는 남편의 임무와 어느 정도 균형도 맞았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며느리아내가 직업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전과 같은 강도로 며느리아내의 도리를 요구하는 것은 일방적인 폭력이고 착취일 뿐입니다.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관습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벌어지는 갈등이지요.

 

이 드라마의 해피 엔딩은 김일리가 남편과의 사랑을 공고히 하는 것도, 김목수와 새로운 사랑을 이루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당하게 자신을 착취하는 모든 짐을 내려놓는 것이 김일리에게는 진정한 해피 엔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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