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올모스트 페이머스

2021.11.10 05:53

어디로갈까 조회 수:592

날밤을 새우는 날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어제부터 시작된 윗분들과의 머리 아픈 논쟁이 오늘도 이어질 예정이라, 아무 작정없이 잠이 달아나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오밤중에 난데없이 카메론 크로우의 <올모스트 페이머스>가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한 분야의 권위자가 햇병아리에게 충고하던 장면이요.

심드렁하고 시니컬하면서도 따뜻한 품성의 음악평론가 래스터 뱅스는 굉장히 유명한 록비평가이죠. 음악전문지 '크림'의 편집장이자 1970년대에 이미 록큰롤의 사멸을 예감하던 그는 크리틱을 지망하는 소년 윌리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알아둬. 평론가는 가수와 친구가 될 수 없어. 가수는 너를 모셔다가 밥 사주고 약도 같이 하고 여자와 놀게도 해줄거야. 하지만 그들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한가지뿐이야. 너를 통해 자신이 신神이 되는 것.
세상에는 정직하고 따뜻한 글만 써도 되는 사람들이 있지. 하지만 평론가는 정직하면서 잔인해야 돼. 평론가로서 올바른 명성을 쌓으려면 정직함과 잔인함을 가져야 돼."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래스터가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체험적인 진실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Rreal world' 에서나 들을 수가 있는데, 요즘은 그런 세계를 함께 구성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참으로 힘들잖아요.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한 사람의 크리틱 critic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크리틱은 세상의 등에(곤충)처럼 성가시기 짝이 없는 존재이기 십상인데 세상은 왜 그런 존재를 허락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밥벌이하는 한 직업군 이상의 무슨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그저 따뜻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옥석을 가리지 않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크리틱이 대중과 구별되는 점이 있기나 한가요. 그 또한 제대로 작동되는 세상은 아닌 거겠죠. 

회사 일로가끔 보스/상사들의 결정에 정직하고 잔인한 비평을 감행하곤 합니다. 아무도 안 하니까 제가 합니다. - - 어제 그럴 일이 있었는데, "당신은 우리에 대한 신뢰가 거의 없군" 으로 시작되는 반론을 받았습니다.
비평의 대상자에게서 나온 반론은 영향력도 설득력도 없어서 볼멘 항변은 덧붙이지 않았어요.  물론 누구나 자신에 대한 평가의 강도를 자연히 깨닫기 마련입니다. 불쾌하셨겠죠. 그렇지만 신뢰가 쪽박에서 물이 줄줄 새듯 센치멘털하게 일방적으로 이뤄지지는 않는 거잖아요. 그것은 표나지 않게 관계의 배면에 공평하게 깔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또 충분히 정직하고 잔인하게 그분들과 맞설 수 있을까? 잠을 놓친 이 새벽까지 줄어들지 않은 고뇌이자 부담입니다. 
어릴 때 읽었던, 누구의 말인지 기억 안 나는  이 조언이 떠올라서 굳이 적어둡니다.
"젊은이는 기성세대에게 환상을 갖거나 그들을 복제해서는 안 된다. 차별하는 권위에 복종하지 마라. 차이만이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위해 힘을 쓰는 게 청춘의 몫이다. 세상의 변화는 구경꾼이나 감상주의자가 아닌 비평가에 의해 시도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의식조차 못할 정도로 느리게 온다.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9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3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53
117669 [영화바낭] 분노 조절 포기 코미디, '와일드 테일즈: 참을 수 없는 순간'을 봤습니다 [14] 로이배티 2021.11.11 438
117668 윤석열 광주 사과문 [7] 왜냐하면 2021.11.11 735
117667 발톱, 손톱 감염 주의하시기를 [10] 산호초2010 2021.11.11 869
117666 첫눈이 사라졌다 를 보고 왔습니다 (스포) [1] Sonny 2021.11.10 324
117665 왓챠 - 브라질/그린 나이트 [6] daviddain 2021.11.10 443
117664 넷플 오늘 공개, 그리고 기대되는 오리지널 신작 영화들 [14] LadyBird 2021.11.10 857
117663 [드라마바낭] 일본 드라마&영화, '라이어 게임'을 다 봤어요 [12] 로이배티 2021.11.10 676
117662 층간 소음은 그렇다치고 냄새는 어디까지 양해가 될까요? [23] woxn3 2021.11.10 1010
117661 웨스 앤더슨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 트레일러 공개 [4] Lunagazer 2021.11.10 424
117660 [회사바낭] 혈압이... [5] 가라 2021.11.10 508
117659 제주에서 서울로 오면서 [4] 예상수 2021.11.10 452
117658 뉴스공장(김어준의 의심) [3] 왜냐하면 2021.11.10 685
117657 마블 안 좋아하는 사람의, 이터널스 내외 뻘글 [6] 2021.11.10 433
117656 러브 포션 넘버 9 (1992) [4] catgotmy 2021.11.10 298
» 문득, 올모스트 페이머스 [5] 어디로갈까 2021.11.10 592
117654 랑종 (을 오래전에) 봤습니다 [4] Sonny 2021.11.10 557
117653 [영화바낭] 화제... 였던 태국 호러 '랑종'을 봤습니다 [12] 로이배티 2021.11.09 763
117652 오징어게임에 진심인 덕질 유튜버 [1] 사팍 2021.11.09 569
117651 오징어게임의 단역배우들의 안타까운 사연 (약 스포 포함) tom_of 2021.11.09 2046
117650 Dean Stockwell 1936-2021 R.I.P. [4] 조성용 2021.11.09 24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