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를 땐 보고 싶었다가 영화평을 읽을수록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본 것 마냥 느끼고 얘기한다는 게 말도 안 되지만,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그냥 있겠습니까? 아마도 ‘세상의 모든 계절은 제게 그런 의미의 드문 영화일 것입니다. 설사 이 영화가 제가 생각하는 것과 훨씬 더 다르다 해도 저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이 글은 영화얘기가 아니겠습니다.

      

      닭인지 달걀인지 모를 오랜 자학과 해소되지 않는 갈증()으로 점철된 삶. 그러나 상황을 타개하고 운명을 극복할 의지는 없이 거대생식기 같은 욕망으로 인해 일그러지고 짜부라진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어쩌면 조금은 알 것입니다.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알뜰살뜰 가꾸며 사는 알토란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박탈감과 열등감. 어지간한 일에 악! 소리는커녕 투정 한 번 안 하고 야무지게도 제 몫을 잘 살아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저 같은 부류의 인간을 싫어할 것이라 직감했습니다. 겉으론 내게 예의바른 거리와 친절함을 유지하면서, 속으론 뭐라 말하기 어려운 성질의 부담감과 거부감을 조장하는 저에 대한 경멸을 숨기면서. 혹시라도 내가 자신의 삶으로 본격적으로 스며들까봐 늘 몰딩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런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한 때는 그래서 전혀 좋아하지도 않는 작가인 K가 거론했던 어떤 문장이 저에게 주문처럼 작용되기도 했어요. 정확히 기억도 안 납니다만, 무슨 재능 있는 사람에 대한 세간의 보편성의 폭력이나 질투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것도 무슨 위로랍시고 철썩 같이 믿고, 어떤 사람들이 나를 무거워하는 건 다 내가 가진 예민함이나 영민한 탓이려니 믿었으니 중2병도 이 정도면 암수준이지요. 저를 싫어하는 인물들의 특성이 다 그렇고 그럼에도 제가 결코 경외감을 잃지 못하는 인물들이 모두 동일인이라는 비극. 그들의 자격은 저같이 불성실해서도 안 되고, 허황된 꿈을 꿔서도 안 되고, 두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불안정해도 안 되는 성실하고 선량한 무고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왔고 운 나쁘게도 그들은 저의 이야기 사슬에 잘도 걸려들었어요.

      

      상대방은 깊숙하게 묻지도 않았는데 신상명세를 공개하고, 종용하지 않았는데 속얘기를 털어놓고, 가장 말하기 어렵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을 백지수표 발행하듯 호기롭게 공개하며 상대방의 반응과 평가를 기다리던 이 고질적 습벽에 대해 저는 불치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립니다. 이건 정말 다른 이야기인 것이고 오직 너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너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야 라는 혼자만의 권리부여와 섣부른 착각.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준비할 틈을 주지 않고 스스로에게 취해서 털어놓는 무수한 이야기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떠들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라는 깨달음. 그로 인해 고갈된 자존심 때문에 나도 언제든 네 얘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고 비밀을 지켜줄 만큼 입이 무겁다고 상대방을 안심시켜 보지만 그 특정 소수들은 제게 일상 말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들려줄 얘기가 없었던 것보단……제게 말하고 싶지 않았겠죠. 내 정서적 삶을 온통 의지해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면서 곧바로 자괴감에 빠지는 이 악순환에 대해, 황인숙의 시처럼 강에서나 떠들어야 할 내 얘기를 일방적으로 들어줘야 했던 그 고충과 인내를 생각하면 머리카락으로 신이라도 삼아야 할 판이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들이 안간힘을 쓰며 나에게서 유지하려는 습자지 같은 두께의 막과 거리마저도 못내 서운한 결핍종자인 것입니다. 그래놓곤 결국 너는 나를 이해하는 척 하면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도발하면서 관계를 종식하는.

       

      자신의 행복을 결코 과시하지 않지만 내심 단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 울타리 바깥에서 아무리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려 봐야 예의바르고 따뜻한 경계가 세콤처럼 작용하여 결국은 터럭 한 끝도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소외감에 대해, 존재 자체로 민폐가 돼버리는 상황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보고 싶고 그리워서가 아닌 습관적이고 간헐적인 궁금함으로 연락이 와서 ‘요즘 별 일 없지?’ 라고 물음을 당하는 관계의 역학구조에 대해. 그럼에도 그 사람의 진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배려들에 대해 이따금 조롱하거나 우롱하는 것으로 열등감을 만회하는 찌질함에 대해. 어떤 극단적인 결정 앞에서는 이들이 느낄지도 모를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사살 함으로 성취감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므로 너에게 털어놓은 비밀이 어떻든 죽을 때까지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앙심에 대해. 월요일부터 이런 얘기 구질구질 길게 쓰고 싶지 않았고 생리도 끝났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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