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바낭]고전적 미래

2011.07.11 03:56

산체 조회 수:1514

우리는 그날 밤 침대로 들어가는 대신, 그녀의 구조도를 눈이 뚫어지게 연구하고, 회로를 따라 사고가 이동하는 미로와 같은 경로를 살펴보고, 신경을 잘라내고, 데이브가 헤테론이라고 부르는 기계 분비선을 장착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 우리가 세심하게 준비해놓은 인간의 삶과 감정에 대한 다양한 의식과 사고가 천공 테이프를 통해 헬렌의 보조 메모리 코일속으로 입력되고 있었다.


-레스터 델 레이. 헬렌 올로이 중.



헬렌 올로이라는 SF 소설의 일부에요. 여기서 저는 저 천공 테이프가 등장하는게 너무도 흥미로웠어요.

천공테이프라는게 뭐냐하면,

"천공 테이프(Punched tape)는 종이 테이프에 구멍을 뚫어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억 매체이다. 비슷한 원리를 사용하는 천공 카드도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랍니다.


저게 왜 재미있었냐하면, 위 인용문은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과정을 묘사한거 거든요. 근데 인공지능 로봇이 작동을 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 즉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방법이 천공테이프 입력이라는게 제 입장에서는 너무 신기했던거죠. 우와. 천공테이프라니. 어쨌든 그건 종이잖아요!!


뭐 요즘 상식으로라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플래쉬 메모리를 이용하는게 가장 합리적이겠죠. usb포트만 있으면 그걸 기기에 꽂고 필요한 프로그램이 설치되는 과정을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기만 하면 될꺼에요.



아마 레스터 델 레이가 저 작품을 쓸때는, 플래시 메모리는 커녕, 시디나 디브이디는 커녕, 하드디스트나 플로피 디스크, 하다못해 카세트 테이프 형식의 저장 매체도 상상을 못했을 꺼에요.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어서 이진법 프로그램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 테이프가 가장 최신의 저장매체였겠죠.

미래에 있을 최첨단 기술의 인공지능 로봇에겐, 당연히 최첨단 종이 테이프로 프로그램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게 저런 묘사를 하게 된 근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천공테이프는, 최첨단이긴 커녕 너무나 낡고 오래된 기록방식인거죠.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도 없어요. 아마 시험칠 때 썼던 omr카드와 비슷한 방식이 아닐까 추측은 하지만...


그러니까 너무나 고전적인, 그래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기술이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먼 미래에나 있을 법한 소재와 결합되어 등장한다는게 너무 신선했던 거죠.



제 기억에는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나와요. 영화판과는 달리 존 앤더튼이 멋쟁이 이혼남이 아니라 시니컬한 배불뚝이 아저씨였던 그 소설에서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스필버그의 환상적인 영화에서처럼 이미지로 펼쳐지는 방식이 아니라, 예언자들 머리에서 추출한 정보를 천공 테이프를 통해 찍어서 다시 해독하던 방식이었던걸로 기억해요.

현재 관점으로 보자면, 스필버그 방식이 훨씬 더 그럴 듯 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요새 관점에선 디지털 기기와 종이는 잘 어울리지 않아요. 무선과 웹이 세상을 지배한 시대인걸요.



뭐 그런 의미에서, 세세한 부분에서 봤을 때 예전 SF 작가들이 그렸던 미래는 오지 않을꺼에요.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미래가 다른 곳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서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

이것도 필립 K 딕의 소설이었던거 같은데, 타임머신의 실수인지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기계를 택배로 받는 어떤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죠.

나름 그 기계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나 그 이야기를 읽는 제 자신이 그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감을 못잡는 내용이 있었어요.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아이폰을 가지고 조선시대에 갔다고 생각을 해보자고요. 그걸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줘도 우리의 조상들에게 아이폰이 뭔지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이걸로는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아니 도대체 사진이라는게 뭔데!!

그래서 우리가 만들거나 상상하는 미래를 배경으로한 여러 이야기들도 먼 미래의 사람들이 보기엔 신기하고 우스워 보일 수 있을거 같아요.

예를 들어 미래에는 키보드와 같은 번거로운 방식을 통해 명령을 입력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죠. 닥터후에서 나온 외계인의 우주선처럼 손만 대면 뇌파를 통해 기기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술이 일반화 될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미래 사람들은 알지 못할 버튼과 조종관으로 잔뜩 채워진 고전적 우주선을 보고, 제가 헬렌 올로이의 천공테이프를 보며 받았던 느낌과 유사한 것을 느끼겠죠.



그래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하하 바보같은 옛날 사람들. 세상이 어떻게 변할줄도 모르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나 지어대다니,라는게 아니라,

반대로 예전 사람들, 혹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미래가 펼쳐지지 않아도 그 상상자체가 너무 낭만적이고 뭔가 독창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거에요.

천공 테이프를 통해 입력된 프로그램으로 요리를 하고 사랑을 느끼는 로봇. 플래쉬 메모리에 저장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랑은 뭔가 느낌이 다르잖아요. 걔는 너무 뻔하니까!!

우리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겠죠. 비록 꼭 그 방식대로 세상이 굴러가지는 않아도, 그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미래인들에게는 색다른 감동을 줄거에요.

말이 안되고 비효율적인 것 같으면서도, 왠지 정감이 가고 '그럴수도 있었겠다' 싶은 동화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결국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빨리 세상이 좋아져서 헬렌과 같은 로봇이 밥을 해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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