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쓴 적 있지만, 저는 인간관계 정리에 참 가차없고 여지없는 여자예요. 그 사람이 싫어져서, 라기 보다는 관계가 계속

유지될 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저절로 멀어지기 전에 알아서...라는 느낌이랄까. 그런 저에게도, 연락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와

상관 없이 번호를 지울 수 없는 친구들쯤은 있지요.

 

   이사가 결정되고, 준비를 하다가 이들에게도 연락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젯밤 '나 이사감. 연말이나 연초에 함

보자.' 했어요. 아래 애들은 다 동네 애들이어서 고삼때 같은 학원을 다녔고, 그래서 대학가도 뭉쳐 만났지만 기실 이들의

구심점은 저. 저 없으면 서로들은 하나도 안 친함. 근데 셋다 기가 막힌 내용의 피드백을 보내옵니다. 저 팔자 어처구니없는 걸로 

어디 가서 명함 안 빠지는 사람인데(물롱 그런거 목 빳빳하게 치켜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응?)) 셋 다 이런 저조차도 어처구니가

없어 입 한번 쩍 못 뗄 정도로 압.......................................으읍....................끄응....................

 

1.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 제 짝이었고, 이후로 고등학교까지 함께 나오며 집안끼리도 몹시 친하게 지낸 ㅂㄹ친구( ..) L.

계속 공부 잘 하고 전교 회장하고 선생님들 이쁨 받고 친구들한테 인기 많던 애였는데, 고등학교때 집이 싹 망하는 바람에

이래저래 안팎으로 프라이드 추락. 장남인 자기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이 나이 될때꺼정 고시공부에 매달리고

있지요. 군대를 여즉 안 갔으니 내년 초 시험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데...오늘 연락했더니 저번 시험에선

또 낙이래요. 내년초 시험이라 저 이사가도 보러 오긴 힘들거라는데, 카톡으로 주고받는 말인데도 어쩜 그리 맥아리없고

기운없고 너덜너덜하고, 한마디로 에너지와 樂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인 게 어쩜 그리 잘 전달되는지. 그래서 '내가 느이 집까지

운신할 수 있게 되면 보러 가겠다, 아줌마 아저씨랑 J(동생. 세살때부터 봤는데 지 형보다 절 더 좋아했었)랑 보고싶네. 저녁

먹으면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내 새 가정 생활기 들려줄게' 라고 짐짓 눙쳤더니 '그래, 어머니 아부지도 되게 좋아하실거야.'

라며 기운 없는 답변. 우리 그녀랑 걔 어무니는 베프였거든요. 아마 친언니인 이모보다 우리 그녀를 더 아끼고 사랑해준 건

걔 어무니일 거예요. 어쨌든 해줄 수 있는 말이 비루하디 비루한 '힘내자' 따위의 그린 듯한 말뿐이었어요. '나 장해등급 받아,

지하철 할인받을 지도 몰라!' 이런 말을 농이랍시고 해야 했다구요(이런 발언의 의도는 '이런 나도 있어, 힘내'일 텐데, 걔는

전혀 상대적 불행이 상대적 위안이 되는 상태가 아니더라구요, 자신의 절대적 불행에 압사당할 것만 같은 상태이므로).

 

 

2. 중학교 때부터 고3 때까지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친해진 여자친구 S. 저의 괴랄한 취향과 성격과 괴팍과 걍퍅을 이만큼

받아주기만 한 애는 이전 이후로 없었어요. 물롱, 더러운 성격은 받아준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링고님이 채현이 교육시키듯

그르케 해야 하는 거예요( ..) 대학가서도 성실하게 지 앞가림 잘 하며 잘 지내고 있었는데, 2년 전 학원알바를 하던 중 불시에

뇌수막염으로 쓰러져 한동안 코마상태. 3주 후쯤 깨어났을 땐 근래 2년 간의 기억을 잃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는 돌아오지

않았다더군요. 문제는 그 다음. 아무 전조증상 없이 불시에 픽픽 쓰러지곤 해서, 그 어디도 운신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고사하고

외출도 못해요. 그 상태로 2년째 보내는 중입니다. 무기력과 우울에 그 밝고 맑던 성격이 좀 비틀리고 변해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 이사간다고, 좀 괜찮아졌음 보자고 연락했더니 내년 복학을 준비하는데, 지금 상태가 또 별로라서 보기는 어려울

듯하대요. 저는 또 얘한테도 '힘내자' 밖에 못해요.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얘한테. 저는 이미 신체 부자유함의 불편함과 막막함,

서러움을 뼈저리게 알아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입이 있으되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런 건 말로 위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깐.

 

 

3. 초등학교 3학년 때 짝이었는데, 당시 우리 그녀의 펄럭펄럭 치맛바람 신공에 담임선생님에게 절대 총애를 받고 애들 사이에서

절대 군주로 군림하고 있던 저에게 유일하게 반항한 남자애 J. 당시 제 권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2교시 끝나고 나오는 우유급식에

두세 개 섞여 있는 초코우유를 저랑 안 바꿔 줬다고 '쟤 왕따 ㄱㄱ' 라고 제가 말하면 그때부터 왕따가 시작되는( ..)(후에 일진이

된 그 애랑 중2때 다시 같은 반이 되어서....그땐 이미 그저 비루한 안여돼 오덕소녀였던 저는...또르르.........) 우짜든동 그때부터

좀 똘똘하고 주관 뚜렷한 구석이 있는 애였고, 고등학교까지 공부를 잘 해서 울나라에서 젤 좋은 대학에 감미다. 의외로 성인이

되고 나서는 죽이 잘 맞아서 같이 술도 자주 마시고 지 다니는 절도 데려가 놀아주고 그랬어요. 오늘 이사간다고 연락했더니,

결혼한댑니다. 내년 2월에요. 이렇게 급작스럽고 급한 거 보면 대충 짐작, 예비 애아빠랩니다. 상대는 절에서 만난 연상년데,

둘다 지지리 읎는 집인 데다 모아 놓은 돈도 있을 리 없어서( ..) 다행인 건 얘가 취업성공, 12월부터 대기업 출근할건데 지방 발령

되는 보직이라 시골 내려갈테니 서울 사는것보단 여러모로 생활비 걱정 덜 하지 않을까 하는거. 그래도 애가 학교 졸업시험준비,

결혼준비, 애아빠될 마음의 준비(살림은 이미 합쳤다데요) 하느라 눈이 핑핑 돌아간대요. 똘똘한 놈이고 지 앞가림 잘 하고 누구한테나 호감 사는 애니까 알아서 하겠지, 생각은 합니다만 빡센 상황인 건 맞네요. 사실 상식과 이성의 잣대를 놓고 생각해 보면

그 상황에 생겼다고 덜컥 결혼, 낳자! 이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21세기 한국의 이십대 중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애들이

얼마나 있을까요.........물롱 축하하고 지가 선택한 인생이니 잘 되고 잘 살길 바랍니다. 그러겠지 싶고. 근데 얘랑은 앞으로 보기

힘들겠구나, 이런 생각은 듦. 청년기와의 참 급한 막결별.

 

 

 

 

   무튼, 이 소식들을 오늘 저녁 한번에 접했어요. 그러고 나니, 원래 제가 의도한 건 그게 전혀 아니었건만, '난 양반이네...'

로 마무리가 되는군요. 걸음이야 뼈 붙으면 걷게 돼 있고, 후유장해야 좀 남으면 어떰. 흉터 때문에 반바지니 치마는 뭐, 여태 남들

평생치 입었으니 됐고 겨울에는 입을 수 있으니 것도 됐고. 나으면 애인님이 일자리 알아봐 주시거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하면

되고, 이제 이사갈거고, 루이죠지 데려와서 햄보카게 잘 살 건데. 씩씩하게 언제나의 내 리듬으로 살아갈건데 아오 씐나. 햄보케라.

   제 친구들이 힘들고 빡세서 위안받는다는 건 아니고, 자기가 제일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조차 더 많은 다른 최악의 수는

이 세상에 얼마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주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장의 불행에 너무 목메 할 필요 없어요. 도리질

뻗쳐 하고 좀 두리번거리다 다른 곳으로 떨쳐일어나 움직이면 됩니다. 유시진 말마따나 세상은 삼차원 꽃밭이잖아요. 내가 지금

있는 어두컴컴 축축 갑갑 쪼끄만데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바깥에 더 좋은 게 있진 않더라도 일단 여기가 아닌 다른 데로

가면 내 인생은 좀 더 총체적으로 무지개색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 됩니다.

   저도, 제 친구들도, 조금 더 훗날에 양껏 마음껏 능력껏 재주껏 반짝반짝, 꽃피어 있길. 신나서 서로의 꽃밭을 보여주길.

그게 초라해봬도 놀리지 않고 짐짓 물 주는 시늉 할 정도의 상냥한 으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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