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하고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주린 배를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똥이 되어 나간 밥이 창자를 거슬러서 되돌아올 수 없으므로, 눈앞에 닥친 끼니의 밥과 지금 당장 목구멍을 넘어가는 밥만이 밥이고 지나간 끼니의 밥은 밥이 아니라 똥입니다.'

 

 

 

 

   훈이할배의 최근작 『흑산』중에서 발췌. 소설은 슬프게도 좀 망작이었지만 이 구절은 할배의 주구장창 이어지던 '끼니론'을 압축/종결할 수 있는 듯해서 인상깊었죠.

 그놈의 '당면했던, 당면한, 당면할 끼니'의 절대성을 요즘 절절이 체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고 해야 할 일이라고는 루이죠지 밥주고 똥 치우는 거랑

'다음 끼니는 뭘 먹지?'를 생각하는 거. 진짜로 그것밖에 없고, 그건 매우 중요해요.

 

  해서 저는, 살림덕&요리덕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으음, 살림욕심은 요리를 하다 보니 이것저것이 필요해서 생겨나는 거여서(침구 가구 이런 인테리어에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생길 것 같지 않으므로) 그냥 요리덕으로 압축해야 옳을 듯해요(그러나, 장르는 몹시 확실합니다. Tag:  밥반찬, 나물, 술안주).

올리브랑 푸드TV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습니다. 쿠킹타임의 샘&레이먼 솁은 요즘 제 아이돌!

독립한 지 4년이고, 그간 음식을 안 만들어 먹었던 건 아니지만 일단 너무 바빴기 때문에 집에서 먹는 끼니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어요. 김계란김치만 있음 밥 잘 먹고, 반찬은 사다 먹어도

충분했고.  

 

   자, 그렇다고 해서 제가 뭐 대단한 거 만드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남들 다 먹는 거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 뿐이에요.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거라지만 천성이 데코

이런 건 거추장스러워할 뿐이니 우리 고양이들 새옴마님처럼 블링블링한 식탁은 차릴 수가 없죠.  

  장보러 나가는 것도 즐거워요. 다리 때문에 등산스틱을 짚고 다니는데 시장 갈때만은 스틱 없이 나가서 양 손 가득 짐을 들고 남들 보기에는 만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뒤뚱뒤뚱 돌아오곤 하죠. 집 100m 근처에 재래시장이 있어서 장볼 목록 작성해 나가기 전 롯데슈퍼나 홈플러스 온라인몰에서 포풍 가격검색을 합니다. 거기선 쪽파

한 단에 2000원이 넘는 데다 혼자 사는 사람한테 한 단은 너무 많죠. 근데 재래시장 가면 한 줌에 천원! 애호박도 재래시장은 크기별로 천원~천오백원에 살 수 있습니다.

강남에선 두 개에 팔천 원 한다는 파프리카도 떨이시간에 가면 천원에 팔아요(왠지 '천원'만은 띄어쓰기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뭘까).

 

  술안주로는 고기만 먹는 주제에 밥반찬으로 소시지나 제육볶음 돼지고기 찌개 따위를 먹는 입맛은 아니어서, 각종 나물류 반찬을 많이 만들어요. 시래기, 표고, 숙주, 애호박, 가지

기타 등등. 조림, 장조림, 무생채 이런 것도 요령을 익혀 두면 만드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고, 직접 만들어 둔 나물 썰어 넣어 비빔밥 만들어 먹으면 스스로가 대견해집니다. 게다가

차린 음식 먹어치우느라 산뜩 사다둔 봉지 조미김들이 줄질 않아요. 이거 몇 봉 뜯어서 주물주물 부숴갖고 김가루나 만들까, 방금 생각했습니다.

어제 힐링캠프에서 차인표가 그랬죠,'근 2년간 뭘 먹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납득했어요. 성실하게 챙겨 먹는 일은 중요합니다. 내 입맛에 맞고 내 몸에 좋은 것을

챙겨먹고자 하는 의지는 나의 생 역시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만들어 주거든요. 뭐 사람에 따라 '맛있는 걸 만들어/찾아 먹는' 낙에 살아갈 수도 있구요.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에 나오는 시로 씨의 마인드가 이제사 조금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음식을 만들다 보니 식재료에 대한 기호성에 변화가 생겼어요. 이를테면, 찌개나 국에 든 고추 같은 건 안 먹었었는데 이게 국물 맛의 어떤 부분을 맡아주는지

알게 되니까 먹게 된달까(그래서 어머니들은 그렇게 남은 음식들을 다 드셨던가!). 그게 차츰 진행되다 보니 어제는 심지어 콩, 두부, 비지, 순두부는 식감이 싫어서 입에도 안 대던

제가 비지찌개를 클리어했죠. 그냥, 계기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건 어느날 문득, 순식간에 '그냥' 돼요. 참치회나 생굴을 먹을 수 있게 됐듯.

가뜩이나 아저씨 입맛인데 이제 홍어만 먹게 되면 완전체가 될 듯하군요-_-

 

  그냥 자려고 누웠다가도, 무슨 음식이 생각나면 먹고싶어 침을 흘리는 게 아니라 벌떡 일어나 레시피를 검색합니다. 오늘은 비지찌개와 섞박지였는데 둘 다 되게 만들기 쉬운 듯해서

이따 날밝으면 장 보러 갈거예요. 최근 지인들에게 만들겠다며 공수표 빵빵 날리고 있는 건 갈비찜. 아마 첫 피해자는 고양이들 새옴마님이 될 듯합니다. 소화기도 안 좋은 양반이신데

미리 명복(...) 뭐어...벚님처럼 막 손맛 푸근하고 내공 쩌는 듯한 깊은 맛은 당연히 안 나지만 뭐든 그럭저럭 비슷한 맛은 잘 내니까요. 어떻게든 되겠죠-_-....

 

  몇 달 전에 '거짓말처럼 모든 것에 대한 흥미와 지적 호기심이 휘발되었다'고 푸념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온갖 허세어린 문화 관련 취미들과 그에 대해 가지던 동경들이 싸악 사라져서 딱히 섭섭한 건 아니었고, 그저 나의 일상을 움직이던 동력원이 없어졌으니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했던 거지요. 원래 사람은 그런 게 필요한 법이잖아요. 그런데 다시 몰입하고 싶은 게 생겼고, 거기에 투자할 만한 시간과 여력이 충분한 나날이어서

저는 몹시 좋아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여러 가지 의미로 충만한 나날을 보내고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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