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바낭] 과잉교정인간

2020.12.18 18:32

가라 조회 수:821

1.

팀장이 되니 결재를 해야 합니다.

전자문서로 결재가 올라오면 읽어보는데... 하아...

맞춤법이나 오탈자가 막 나와요. 단 한번도 안나온적이 없어요. 

비문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쳐요. 문장이 불명확한것도. (하지만 자네는 인문학 석사 아닌가...? 학위 논문을 이따위로 쓰진 않았을텐데...)

실적 보고를 하는데 숫자가 틀려요.

어떻게 아냐구요? A 실적 90, B 실적 93 평균 95 라고 적으면 당연히 이상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 실적이 나온 데이터를 안봐도.. A와 B 사이의 값인 90~93 사이의 값이 나와야 하는게 일반적이니까요.


팀장님은 오탈자를 어떻게 찾아내냐고 합니다. 자기 눈에는 안보인다고. 숫자 틀린 것도 안보이고. 목표 미달에 빨간색, 초과에 파란색 표시하는데 그게 틀린 것도 안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자기가 쓴 글의 오탈자 찾기 힘든거 이해 합니다. 하지만 매번 반려 당하면 줄어들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거 아니겠습니까.



2.

다른 회사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는 오탈자가 있는데 팀장이 못 보고 승인을 했는데 2차나 3차 승인권자가 그걸 봤으면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오탈자도 못본거 보니 대충 검토했구나. 신경 안썼구나, 이거 숫자는 맞는거야? 같은 소리를 들어요.

그렇잖아요. 오탈자가 많으면 기본적인 퇴고나 고민은 한건가? 의문이 들 수 밖에.

결재문서는 두고두고 남는데, 공식 문서에 오탈자나 비문이 있으면 나중에 찾아본 후배들이 뭔 생각을 하겠어요. 이 양반들은 이걸 보고 결재를 다 해줬다고?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 친구는 아니 내용을 봐야지 왜 오탈자를 보냐. 오탈자 좀 있으면 어떠냐 내용이 중요하지... 라면서 오탈자나 숫자 틀렸다고 반려를 하면 승질을 부립니다. 그러다 보면 언성이 서로 높아지죠

그리고 딱 지적한 부분만 고쳐요. 물론 아래도 오탈자가 더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오탈자 없는 버젼 받으려면 두세번은 반려해야 합니다.



3.

내용은 잘 쓰느냐...

종종 틀린 내용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거 내용이 안 맞는것 같은데? 확인해봐요' 하면 또 승질 내면서 그 내용을 그냥 지웁니다.

오탈자 지적할때는 내용이 중요하다더니, 내용 지적을 하면 어차피 윗분들은 돈만 보지 않냐고 그런 디테일이 뭐가 중요하냐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매우 관대하지요. 



4.

지난달에는 30페이지 짜리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고생했지요. 물론 거기 들어가는 내용은 팀이 모두 한거지만 그걸 종합 정리하는것도 큰 일이니까요.

제가 보통은 요약본만 검토하고 (거기서도 이미 지적이 많았지만) 마는데, 그날따라 첨부파일까지 열어봤습니다. 


"어?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이 말이 왜 들어가나요? "

"......"


다른데서 멋있어 보이는말 복붙했으니 자기가 이 내용을 왜 넣었는지 모를 수 밖에..

자기가 일 열심히 했다는 티를 내기 위해 의미 없는 수식어나 문장을 여기저기서 따와서 넣으니 페이지는 늘어나는 거죠.


아니, 팀장님 어차피 윗분들은 이거 안보잖아요. 요약만 보지.

(그러면 요약본은 왜 오탈자 투성인데...? 라는 말이 나올뻔 했지만 참았습니다.)


이때는 정말 안되겠다 싶어서 빨간색 볼펜으로 오탈자와 비문, 쓸데 없는 문장을 일일히 찍어줬어요. 

정말 30페이지중 한페이지도 빨간색이 없는 페이지가 없더군요. (내가 빨간펜 선생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지금 내가 논술과외하나..)


본인도 제가 이렇게 까지 하니 반박 못하고 고치기 시작합니다. 이 첨부파일도 세번쯤 반려 했습니다. (그냥 한번에 다 찍어주면 안되냐고 하더군요. 내가 기계냐..)


그런데... 다다음날 사장이 불러서 가보니 첨부파일의 그 30페이지 짜리 열어서 한페이지 한페이지 저한테 보고 받더라고요.

와... 첨부 안열어보겠지 하고 대충 넘겼으면 어쩔뻔.... (....)

사장님 저희한테 왜 이러세요. 결재 하루에 수십개 하시면서...




5.

보통은... 오탈자나 비문 같은 기안의 기본은 1,2년차때 지적 당하는거고... 4-5년차쯤 되면 내용에 대해 지적을 하게 되고, 10년차쯤 되면 그냥 슥 보고 OK 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제가 기대가 너무 과한가요? 저는 그랬는데..? 제가 이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편도 아니고, 날고 기는 에이스들 사이에서 그냥 오래 버티고 운 좋아 팀장 하고 있는건데.

(언제 위에서 다시 팀원하라고 할까...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십수년 경험이 있으니 사원 대리들 보다야 잘 하지만... 사원 대리들 보다 일 못하면 월급값 못하는거죠.



6.

내가 너무 맞춤법이나 문장 표현에 집착하는 과잉교정인가..? 

이제는, 내가 너무한건가? 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왜 10년차에게 빨간색 볼펜으로 오탈자부터 교정해주고 있어야 하는가... 10년차가 반려를 대여섯번 당하고 있으면 부끄럽지도 않나...

(결재 올렸다가 반려해서 수정할때마다 version 표시가 올라갑니다. 윗분들은 이게 몇 버젼인지 보실 수 있는거죠. 제 윗분들이 가팀장이 굉장히 꼼꼼하게 보는구나. 라고만 생각해주면 다행인데, 이건 뭐 버젼이 이렇게 높아? 얘는 기안을 대충 쓰나? 라고 생각해버리면 난감해지는겁니다.)


오늘도 두번 반려 당하더니 퇴근직전에 결재 올리고 퇴근해 버렸는데, 또 비문을 발견했습니다. 

이거 오늘 제가 승인해야 적기에 사장까지 결재 끝날것 같은데... 다음주 월요일까지 기다릴수도 없고.. (임원들은 주말이나 새벽에도 결재하니까, 제가 오늘 결재하면 2일의 시간을 별 수 있습니다.)


갑갑....


왜 기안문에 자기 이름이 박힌다는 것의 무게감을 모르는걸까요. 승인권자가 결재를 한다는 것은 그 문서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이 되는걸 모르는 척 하는 걸까요.

어차피 뭐 틀어지면 팀장님이 결재 하셨잖아요. 라고 하면서. 


오탈자가 중요합니까, 내용이 중요하지

쉽게 쉽게 좀 가주세요

어차피 윗분들 내용 자세히 안보시잖아요. 팀장님만 결재해주면 그 뒤로 반려 안당해요.


왜 이딴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걸까요


저는 왜 금요일 밤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까요.


나이차이도 얼마 안나고, 인원도 모자라니 좋게 좋게 사람 고쳐서 쓰고 싶은데 결재만 올리면 열 받고 서로 언성이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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