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24년 묵은 영화죠. 당시 엄청 화제였지만 제가 이전 장선우의 화제작 몇 편을 보니 별로 제 취향 감독이 아닌 것 같아 스킵했다가 엊그제 catgotmy님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글을 보고 문득 떠올라서... 그냥 봤어요. 스포일러 같은 건 존재할 수가 없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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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포스터)



 - 스토리 같은 게 없으니 무얼 다루는 영화이고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끝나겠네요.

 

 1. 이야기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러니까 세기말 대한민국의 '길바닥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개봉이 1997년이었는데 극중에 겨울부터 나오는 걸 보면 1996~1997년이 배경이겠는데, 영화의 개봉 몇 개월 뒤 대한민국이 IMF로 나락에 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IMF로 인한 대격변 이전 세계관(?)의 대한민국 최전성기, 말 그대로 리즈 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고 내년에 우린 올해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고 있을 거야! 라는 낙관이 지배하던 시절. (정작 그 시절엔 그게 '낙관'인 줄도 몰랐습니다만, IMF가 가르쳐 주었죠) 그 시절 서울의 길바닥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하던 비루하고 끔찍한 삶들이 있더라... 는 걸 보여주고 싶어하는 영화. 뭐 그런 느낌이었어요. 원래는 집 나간 청소년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는데, 찍다 보니 그들과 함께 노숙자들이 눈에 팍팍 띄어서 노숙자 관련 분량을 추가했다고 그러죠. 뭐 합당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생각하면 IMF 이후 노숙자 문제는 이슈가 되고 그랬던 기억이 많이 나는데, 그게 워낙 강해서 그 이전에도 이렇게 노숙자가 많았다는 기억은 지워져 버렸거든요. (물론 제 얘깁니다) 참고로 영화 속에선 '노숙자'란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행려'라고 하네요. 맞아요. 원래는 그렇게 불렀었죠.



 2. 장르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 


 실제 길바닥 청소년, 실제 노숙자, 실제 폭주족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보이긴 하지만 역할을 갖고 계속해서 등장하며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인물들 중 다수가 배우들이에요. 현실성을 위해서인지 청소년 역할들은 아예 생짜 신인들에게 맡기고 어른 역할들은 당시 기준 거의 무명(연극판에선 안 그랬겠습니다만)들에게 맡기고 있지만 어쨌든 배우들이죠. 경력 없는 프로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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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가출 청소년들을 캐스팅해서 숙소 잡아주고 어찌저찌 찍었다!! 라고 밝혔는데... 어디까지의 진실일지는 믿거나, 말거나죠.)


 근데 좀 웃기는 건 이 영화가 '페이크'를 잘 하는 것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영화 연출에 아아아아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걸 보면서 다큐멘터리라는 착각을 할 수가 없어요. 미리 준비된 카메라에 맞춰 동선, 구도, 대사까지 정말 딱딱 떨어지게 사건이 벌어지고 장면이 전개되는 모습들이 계속 보이니까요. 애초에 이 영화 첫 장면이 인디 밴드 콘서트장의 모습인데, 그 밴드가 부르는 노래가 이 영화 주제가(!)에요. 후렴으로 계속해서 '나쁜 영화! 나쁜 영화!!'를 외칩니다(...)

 혹시라도 이 영화를 보면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연출인지 모르겠어'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더러운 해상도의 화질과 별로 프로답지 않은 느낌으로 마구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일 겁니다. 어차피 제작비도 많이 못 들였으니 저렴함을 리얼리티로 승화시킨 나름 영리한 작전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ㅋㅋ


 당연히 이런 어설픔이 의도인지 한계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 같아요. 일단 제가 기억하는 세기말 '아티스트'들의 감성에는 뭐가 되었든 규칙에서 벗어나면 대략 예술... 이런 분위기들이 있었으니 의도였을 수 있고. 또 '거짓말'이나 '성냥팔이소녀' 같은 영화들을 돌이켜보면 장선우는 열심히 일탈을 하며 쇼킹한 뭔가를 추구했지만 그게 그렇게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안 들었거든요. 시도와 의도에 방점을 찍지 않으면 좋게 말해주기 좀 곤란하달까. 그래서 그냥 한계였던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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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뉴스가 일상적이던 시절이었죠. 특히 장선우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 '거짓말'과 이 영화로 거의 단골 수준이었던. ㅋㅋㅋ)



 3. 별로 접점이 없는 18개의 에피소드를 쭉 나열하는 형식의 영화입니다.


 그 중 절반 이상에 등장하는 고정 캐릭터들이 있긴 한데, 어쨌거나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은 없어요. 기승전결도 없고 흐름도 없죠.

 놀러갈 택시비 마련하려고 새벽녘에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애들 보여주다가, 갑자기 여학생들 패싸움 보여주다가, 돈 벌려고 단란주점 취업해서 일하는 여자애들 보여주다가, 또 뭐 생활비 떨어져서 퍽치기 하는 애들 보여주고, 힙합 좋아해서 댄스 배틀 도전했다가 폭망하고 죽고 싶어하는 애 보여주고, 길거리 노숙자들 일상 별 무의미하게 보여주다가... 그냥 이런 식이에요. 그리고 이 중 1/3 정도는 그냥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ㅋㅋㅋ


 근데 그런 무의미한 에피소드들의 배합 때문에 오히려 '길거리 인생들의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게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역시 리얼한 '기분'이 들게 되는 효과가 있는데. 문제는... 그 역시 관객이 '이런 에피소드는 왜 들어갔지?'라고 의도를 생각하는 순간 효과가 뚝 떨어진다는 게 아닌가 싶었네요. 장선우의 영화 중 두 편의 제목을 서로 바꾸는 게 좋지 않나 하는 뻘생각도 해봤어요. '거짓말'과 '나쁜 영화'의 제목을 서로 바꿔 붙이면 오히려 각각 더 잘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장선우 안티스런 생각. ㅋㅋㅋ



 4. 세기말 키치 갬성 & 아티스트 부심이 폭발합니다


 매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마다 '어때 이 무성의한 자막이? 정말 파격적이지? 혹시 아방가르드 아세요? 키치는요???' 라며 몸부림치는 느낌(...)의 제목이 화면에 뜨구요. 이야기 진행 중에도 계속 떠요. 색깔도 폰트도 마치 '보노보노PPT' 느낌인 것이 담고 있는 내용까지 유치하게 계속 뜨며 자기를 봐달라고, 정말 파격적이고 튀지 않냐며 몸부림치는데... 하하 것 참. 물론 2021년의 관점에서 이 시절 키치를 평가하는 건 좀 에러이긴 하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지금 이 시국에 보기엔 그냥 민망할 뿐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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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방가르드! 전복의 미학!! 키치!!! 이것이 예술이다!!!!!)



 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애들이 술 취한 여자애 한 명을 윤간을 해요. (심의에 걸려 다 삭제 되어서 실제로는 그냥 그 일이 다 끝난 후의 상황만 나옵니다) 그런데 쌩뚱맞게 카메라가 일이 벌어진 방 바깥에 있는 스틸 촬영 담당자의 모습을 비추며 '스틸 안 찍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담당자는 화를 억누르는 말투로 담담하게, 하지만 눈가엔 눈물이 고인 채로 이런 얘길 하는 거죠. 이건 나쁘다. 이건 정말 나아쁜 영화다!!!

 

 ...하지만 어차피 그 장면은 다 연출이고 연기였잖아요. 할 말은 많지만 생략을(...)



 - 정리하자면 전 대충 이렇게 봤습니다.

 그냥 그 시절에 봤어야 할 영화 같아요. 곱게 늙기 실패! 제 성향상 그 때 봤어도 그리 좋아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지금만큼 투덜거리진 않았겠죠. ㅋㅋ

 완성도든 성향이든 몹시 90년대스럽습니다. 그때까지 한국에 없었던 서양 것을 가져다가 나름 열심히 따라했는데, 그 나름의 존재 의미는 있겠지만 완성도 측면에선 부족한 것이 많구요. 하지만 어쨌거나 만든 사람은 당시 한국 기준 분명한 능력자여서 괜찮은 구석도 있구요.

 암튼 2021년의 거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 굳이 찾아봐야할 이유가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단역으로 나와 현재는 성공한 배우들의 팬이거나, 아니면 그냥 imf 직전 대한민국 서울의 길거리 구경을 두 시간 동안 하고픈 분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혹은 세기말 아티스트의 폭발하는 자의식 구경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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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라 1997!!!)




 + 지금 와서는 더더욱 다큐 행세가 어려운 영화죠. 알고 보니 1997년에 송강호가 길거리 노숙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에야... ㅋㅋㅋ 게다가 지금 확인해보니 드디어 송강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넘버3'와 이 영화의 개봉일이 같아요. 당시 극장에서 눈치 챈 사람들도 많았겠네요.

 뭐 감독 말로는 그래도 실제 상황도 많이 담았고, 극중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실제 길거리 청소년들을 취재해서 얻은 이야기들을 재현한 거라고 하니 그랬구나... 현실적인 거구나... 하긴 합니다만. 솔직히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리고 이후 장선우의 행보를 보고 나니 그 말도 좀 못 믿겠습니다. <-

 다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장선우는 정말 저 청소년들을 이해하긴 한 걸까. 결과물을 봐선 그런 느낌이 거의 안 드네...



 ++ 지금 시국이라면 이런 영화는 훨씬 리얼하게 만들 수 있을 거에요. 그냥 진짜 다큐로 찍어 버리면 되죠. 카메라 성능 좋은 스마트폰 들고 다니며 찍어도 이것보단 화질 좋을 거고. 실제 길거리 청소년들을 출연자로 캐스팅하기도 더 쉬울 거고. 다만 그 때나 지금이나 실제 범죄, 폭력 현장을 영상에 담아 공개한다면 골치아파질 테니... 그냥 안 만드는 걸로.



 +++ 이 영화에서 청소년 역할로 나온 배우들은 이후에 잘 풀린 경우가 없네요. 그 중에 딱 봐도 '이건 그냥 연예인 외몬데?' 싶었던 여자분 한 분만 이후로 십년 남짓 활동하셨는데 크게 주목 못 받고 지금은 은퇴하신 듯 하구요. 반면에 노숙자, 가게 점원 같은 역할로 나온 성인 배우들은 많이들 성공하셨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송강호에다가 안내상, 기주봉, 김기천, 이문식, god 박준형 등등.


 덤으로 위에서 언급한 '스틸 담당자'는 외모를 보고 스틸 담당인 척하는 배우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사진 하는 분이셨더라구요. 검색해보니 그 해부터 사진 작가 활동 시작하셨다 그러고 최근까지도 활동 관련 기사가 검색이 됩니다. (청소년) 배우들보다 더 성공하셨...



 ++++ 기억들 하시겠지만 처음엔 심의에 걸려서 개봉을 못 할 위기에 처했었고, 그래서 이것저것 다 열심히 잘라내고 간신히 개봉을 했었다... 라는 사연 덕에 실제로 보여지는 장면들 중에 그렇게 수위가 높은 부분은 없습니다. 지금와서 이 영화를 끝까지 보기 힘들다면 자극적 장면이나 표현 수위 때문이 아니라 탁월하게 구린 화질 때문일 겁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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