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없는 남자'를 봤어요.

2022.02.13 22:43

thoma 조회 수:512

(20년 전 영화지만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The Man Without a Past, Mies vailla menneisyytt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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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성냥 공장 소녀'가 인상적이라 왓챠에 있는 이 영화도 봤습니다.

주인공은 여행지인 헬싱키에서 강도에게 머리를 맞고 기억을 잃습니다. 돈과 소지품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이 남자가 빈민가에서 구조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얘기예요. 

기억을 상실해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게 된다는 설정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이야기 거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나 tv드라마들에서 이리저리 활용했고요. 기억을 잃은 후의 상황과 기억이 돌아오거나 원래 주변인들이 자신을 찾아내거나 해서 기억 상실 이전의 상황이 충돌하며 갈등하는 내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쪽 사람들을 선택해야 하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요. 이 영화는 깔끔합니다. 일단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원래 가족을 찾게는 되지만 파탄 직전의 상황에서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난 차에 사고가 생겼었고 자신이 사라진 이후 완전히 정리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정체성의 혼란 문제나 두 삶을 두고 선택의 갈등을 하는 문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일종의 실험을 진행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런 배경도 기억도 없이 홀로 다시 산다면?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회적 역할과 대부분은 타의에 의해 조성된 욕망과 자신에 대한 습관화된 좌절감으로 이루어진, 나 자신이라 생각하며 진저리냈지만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이런 것들에서 놓여나서 살아본다면? 

영화는 주인공이 자고 먹고 입는 것을 마련하게 되는 과정에서 빈민가와 주변 사람들의 단순하고 별 생각없이 행해지는 선의와 도움을 보여 줍니다. 없이 살면서 생판 타인에게 돈을 쓰다니 그러니 가난을 못 벗어나지,라고 경제 관념 철저한 중산층이라면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이웃과 함께 구세군에 가서 특식도 먹고 옷도 얻어 입고 버려 놓은 것들 이것저것 주워 모아 컨테이너 거처를 꾸미고...일과 연인까지 생기네요.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적어도 되는지 보여 주고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게 재지 않으면 얼마나 쉽게 가능한지도 보여 줍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해딩한 사람이지만 단순한 삶은 충족이 가능하다는 걸요. 

'성냥 공장 소녀'가 전달 방식이 특이했었는데 이 감독의 기본적인 성향이었던 모양입니다. 큰 동작, 다채로운 표정 연기, 풍부한 억양 -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극적이고 호들갑스러운 것들을 배제하는 전개, 아무도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연기를 합니다. '성냥-'은 암담한 분위기였지만 이 영화는 유머러스한 면이 있고요. 어떤 장면은 마치 학예회의 무대에 오른 아마추어들의 연기 같아요. 감정을 살리는 것이 너무나 쑥스러운 듯한 연기말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학예회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옛날 이야기나 동화의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량한 극빈자들끼리 돕고 정서적인 나눔을 하는 꿈과 같은 이야기니까요. 몇 개 안 되는 감자를 수확해서 연인과 먹을 것과 내년 씨감자를 제하고 하나를 다시 반으로 나누어 이웃에게 주는 장면에서 확실히 그것을 느끼게 하네요. 은행과 관공서의 지배하에 있는 착취적이고 경직된 삶과는 다른 형태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우화적인 실험이라 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꼭 기억 상실이라는, 머리를 몽둥이로 연타로 두둘겨 맞는 충격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아도 조금쯤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과거에 쫓기지 않으며 현재를 미래의 담보로 삼지도 말고 오직 현재에 살자고 매일 다짐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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